목회를 시작할 즈음, 한 자매가 있었다. 사회사업학을 전공하고, 피아노를 치는 아가씨였다. 지금은 16년의 세월이 지나 사십 줄에 접어 들었을 텐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녀의 꿈은 이곳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동부의 더 좋은 대학에 가서 박사를 받은 다음 유엔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그 자매는 당시 한 주택에서 세를 들어 살았었다. 좁은 공간임에도 필요한 것은 다 있어서 혼자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자연스럽게 본가와도 연결되어 ‘가족’처럼 함께 지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녀가 집 주인과 이야기가 잘 안되어 그러니 같이 가자고 해서 요청했던 적이 있다. 집 주인은 세입자인 그녀가 싫은 것이었다. 어떻게 표현은 못하지만 주인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제발 나가만 달라는 표정이었다. 이 자매는 철저히 계산적이라 절대로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가난한 유학생이니 주인과 몇 가지 협상을 한 모양인데 잘 되지 않았다.
집 주인은 이혼하고 외롭게 두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였다. 같은 여자의 입장이니 매달 방세 보다도 그녀는 이 자매에게 주인의 아이를 봐 준 달지, 청소를 한 달지…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달지… 등등 따듯한 관계를 원했던것 같다. 그런데 사사건건이 따지고 계산하는데 주인이 몹시 상처받은 듯했다. 특히 미국 여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 자매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사람의 관계는 예술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대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솟는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으면 청춘 남녀가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서 한 집에 같이 살기로 하고, ‘결혼’이라는 것을 할까!
그런데 오늘날 ‘한 집에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힘든 일이 되었다. 일인 가구가 인구의 반으로 접어드는 마당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사정상 잠시 홀로 지내기도 하겠지만 ‘개인주의’가 사람들 사이에 더 심해진 것이 아닐까?!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고 그런 사고방식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선택도 귀중히 여기므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 인간의 관계가 그렇게 칼로 묵 베듯이 되는 것인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살지만 다른 사람은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뼈와 뼈 사이에 연골이 있어 몸이 자연스레 일할 수 있듯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심정을 알리고 이해하며 배려하고 살면 문제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 조차도 귀찮은 것이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 자신을 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존심이 세고 개인주의에 쩌들은 사람은 자신은 열심히 살지만 주위의 사람이 힘들다. 피가 섞이지 않는 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당사자는 별로 힘들어 하지 않는다. 자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주위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열심히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도 공부하고 식사도 같이 하며 가족같이 지내는…. 그래서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고 주 안에서 은혜를 나누며 성장하는 곳이다. 이렇게 서로 말씀으로 긴밀하게 지내다 보면 거울을 보듯 자신을 보게 되고 성숙을 향해가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도 인정하고 하나님과도 화목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교회 공동체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의 생명줄이다. 성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만나야하고 교회는 성장하는 교인들로 채워져야 한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며서 어린아이같이 행동하고 말 한다면 참으로 여러 사람이 힘이 들고 건강하지 못한 조직이 될 것이다. 성숙의 의미가 더더욱 간절한 이 시대를 맞이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자존심을 던져 버리고 주존심으로 더더욱 무장해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이 추수의 계절에 개인주의를 벗어버리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교회, 국가에 화목을 이루는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
김미연 사모
어스틴 하이드팍한인침례교회(은퇴)
‘살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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