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영 l 동행

십 년 전 같으면 벌써 민소매를 입고 다녔을 텍사스의 늦은 봄, 계속해서 궂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독한 감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아서 불안하다 했더만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슬초빠가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워낙에 건장한 체격이고 또 펄펄 뛰며 집회 인도를 하는 사람이라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독한 항암제의 부작용이라는 것은 무시할 것이 아니더군요. 혈액암이라는 것은 오롯히 항암제로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었더래서 독한 화학요법 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조혈과 면역에 관련된 기능들이 영향을 받게 되어 보이지 않는 후유증이 남게 된 것입니다. 면역에 대한 부분은 주기적으로 외부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만, 아무래도 본인 스스로의 면역 능력보다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덕분에 이번처럼 전염성이 강한 호흡기 질환이 돌 때에는, 가끔 병원 신세를 져야 합니다. 이번에도 응급실을 통해 바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첫 며칠 동안은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병세가 잘 꺽여서 무사히 퇴원을 하고 일정 기간 휴식한 후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일이라는 것이 닥치면 해내게 마련입니다. 슬초네도 예전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보면, ‘아, 저 분들 정말 대단하시다.. 우린 저런 상황이 되면 저렇게 꿋꿋하게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것 같다…!’ 라고 생각했었더랬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민자들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갑작스러운 병마의 공격 앞에서, 어린 딸 슬초를 데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씩씩하게 헤쳐나왔던 시간은 슬초네 주변의 지인들과 오랜 애독자들이 더 잘 아시는 바입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들을 통해 평안할 때에는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신의 음성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평안할 때에는 알지 못했던 수많은 중보자들의 눈물의 기도와 마음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간과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점검할 수 있게 되었더랬습니다.
모든 힘든 시간들이 지나가고 다시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매사에 겁없고 씩씩해서 ‘인간 로보캅’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던 슬초맘에게 깊은 무력감과 우울함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나 할까요..? 모든 것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는데, 막상 아팠던 당사자도 아닌 슬초맘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깊은 우울함의 소리없는 침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것입니다. 직장 일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 볼 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고, 사람들을 피해 먼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시간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어쩌면 간만에 갑자기 찾아 온 위기에  온 힘을 다해 대처한 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방전 상태에 빠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 덕에 강철 인간 슬초맘이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골방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단순한 기도의 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한 외적인 모습 속에 숨겨져 있던 두렵고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내면의 자아를 초청하여 함께 차분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큰 일이 터질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던 약하고 두려움 많던 어린 소녀였던 제 자아는 이번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간 힘들었다고, 좀 지쳐서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으며, 사무치게 외로워하지 않고 있었고, 두려워 떨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하고도 담대하고도 씩씩한 성인의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한 후 7년, 그간 외적인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제 자신의 내적인 모습이 바뀌고 성장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 좋은 계기였습니다.
하늘에서 내 이름이 불리울 그 날, 신 앞에 서게 될 나의 모습은 그간 수많은 이들에게 외적으로 보여지던 그 모습이 아니라, 내 중심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바로 모습이겠지요. 그래서 이번의 어려움을 통해 다시 만나고 확인하게 된 부쩍 성장해 있는 저 스스로의 모습이 참 기특합니다. 살아 갈수록 신앙은 그 어떤 종교적 외침이나 행실이나 활동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 속에서 은밀하고도 고요하게 동행한 신과의 많은 이야기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은밀한 동행이 슬초맘을 일으켜 다시 불굴의 로보캅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4월의 텍사스, 폭풍 후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강합니다. 저도 이제 다시 손을 털고 일어나, 주어진 길을 다시 힘차게 달려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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