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전쟁사(戰爭史)에는 이스라엘 정복 전쟁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가나안땅에 거주하던 부족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전 후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살아남은 부족들도 제대로된 국가 틀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왕명의 출납과 국가적 사건을 기록하는 체계적인 사관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높은 문화적 수준으로 문자를 개발하였던 이집트, 바벨로니아, 아시리아 등을 제외하고는, 가나안땅 내에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던 부족 또는 도시국가들에 관한 전쟁기록은 성경에 언급한 역사적 기록외에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한 맥락에서, 본 장에서 소개할 여리고(Jericho)성 및 아이(Ai)성 전투 역시, 성경에서만 언급된 수많은 전쟁 중에 하나이다.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라암셋(Rameses)을 떠난 지 40년만에 사해 북동편 모압평원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 광야에서 숙영한 장소만해도 숙곳(Succoth)을 포함하여 33곳에 이른다. 한 세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 동북부 사막일대를 속절없이 유랑하였다. 불순종의 댓가를 한 세대 전체의 몸값(Ransom)으로 보속(Satisfaction)한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의 광야생활은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였다. 철저히 낮아짐을 통하여,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유비적으로 그들에게 전능자의 도움없는 인생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이 기간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여호수아 장군이 지도자로 임명되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민족은 오랫동안 그들을 영도하였던 2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제사장 아론은 그의 나이 123세에 호르산(Mount Hor)에서, 이어서 모세는 120세에 모압땅 느보(Nebo)산에서 눈을 감았다.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Joshua)가 민족의 지도자직을 승계받았다. 40년간 모세를 보필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의 완악한 마음을 보아왔기에,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적진으로 들어갈 텐데, 혹시라도 적의 기습을 받는다면 이 백성의 아우성과 성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예측할 수 없는 앞날로 인해, 여호수아는 양 어깨에 감당하기 힘든 중압감을 느낀다. 그러나, 모세 사후에 그는 여호와의 직접적인 소명을 받았기에 이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너는 이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2).
우선,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를 소집하여 3일후에 출발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이이서, 요단강 건너편의 상황을 정확히 탐색하기 위하여 정찰병을 보내었다. 복귀한 정찰병의 보고내용인 즉, 이스라엘백성의 전면 요단 건너편에 아모리족속의 9명의 왕과 가나안족속의 24명의 왕이 연합하여 여리고 평원에 견고한 방어망를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아벨 싯딤(Abel-Shittim)평원에서 요단강 건너편 적진을 바라보는 여호수아 장군은 의외로 강한 적을 마주하고 긴장을 하고 있다. 이 순간, 그의 유일한 위로자, 여호와는 반복해서 여호수아를 격려한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수 1:9).
1차로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홍해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도보로 도하하기엔 수심이 깊다. 그러나, 홍해 도하시에 보았던 기적의 재현(再現)으로 강을 쉽사리 건넜다. 그리고 여리고(Jericho) 동쪽 경계인 길갈(Gilgal)에 본영(本營)을 설치했다. 가나안땅 진입을 위하여 여리고성은 반드시 정복해야 할 첫 관문이다. 길갈에서 여리고까지는 12km남짓, 공성장비가 없는 이스라엘로서는 산을 배경으로 견고하게 축성된 여리고성을 격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리고성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위에 대해 잘 대비하고 있었다. 수확이 막 끝난 시기라 그들은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도 있었다. 전쟁을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풍부한 식량과 충분한 물이 있고, 성외곽 또한 견고 하였으므로 아마도 여리고성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그다지 두려워 하진 않았을 것 같다.
전쟁에 개입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전투 전에 이미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손에 붙였으니”(수, 6: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독특한 여리고성 공격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여호수아는 군사들로 하여금 여리고성 주위를 6일간은 하루에 한 번씩, 7일째되는 날은 일곱바퀴를 돌게 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양각나팔 소리를 길게 울려 불때, 모든 백성이 있는 힘을 다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게 했다. 그러자, 견고한 여리고성이 일순간 무너졌고, 이스라엘군은 그 성을 향하여 돌진, 모든 생물을 진멸함으로 성을 함락하였다.
숨돌릴 뜸도 없이, 이어서 이스라엘군은 아이(Ai)성을 공략한다. 여리고성 전투와는 달리 아이성 전투는 현대전의 모범이 될만한 뛰어난 전략이 투사된 전투였다. 이스라엘군의 적용한 작전형태는 포위작전이었지만, 기만작전, 유인작전, 매복작전, 그리고 포위작전이 총체적으로 적용된 전쟁이었다.
먼저, 여호수아는 삼만명의 보병을 야간에 은밀히 이동시켜 아이성과 인근 벧엘(Bethel)사이에 매복시켰다. 다음날, 직접 군사를 진두지휘하여 아이성 정면으로 이동했다. 성문 앞에 이르러 모든 병사로 하여금, 성안에 있는 적을 향하여 조롱과 격한 야유를 퍼붓도록 지시했다. 적의 화를 돋구어, 적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오도록 하는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이 계략은 적중하여, 마침내 성문이 열렸다. 이 때 이스라엘군은 혼신의 힘을 다해 광야길로 후퇴한다.
아이왕은 적의 퇴각에 득의양양하여 전 병사 및 민간백성까지 동원하여 여호수아 군사를 추격한다. 이것은 큰 실책이었다. 적어도 성(城)에 경계병과 잔류병은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언약은 이루어져야 했기에 이것은 실책이 아니라 섭리라 해야 옳은 듯 하다: ”내가 아이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네 손에 주었나니” (수 8:1).
아이성이 빈 사이, 반대편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스라엘 삼만 병사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무혈입성했다. 점령완료하였다는 신호로 봉화를 올리니, 후퇴하던 이스라엘 병사들이 급속히 180도 회군하여 추격하던 아이군과 정면으로 맞부딪힌다. 동시에, 아이군의 뒷편에서는 성을 점령한 이스라엘군이 나와 저들의 후방을 압박한다. 아이군은 완벽한 포위작전에 걸렸다. 전사를 볼 때, 이같은 포위작전에 걸린 진영은 예외없이 전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이 거민 일만 이천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여리고성 전투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그리고 이해가 불가한 전쟁이었다. 이 사건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측면에서 이해해야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즉,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분이 개입하시면 인간의 불가능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하셨고, 전능하신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혹자는 전쟁의 처음부터 결말까지 계획하고 지시하신 여호와께서 이방인에게 참으로 무자비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속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십계명을 어긴 이 살벌한 살육도 섭리라는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과 한번 맺은 언약- 가나안을 너에게 기업으로 주리라- 은 반드시 이루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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