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봉의 한국 문화 산책: 국방, 민생, 민정을 위해 제작된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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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 와서 달라진 생활 습관 중의 하나가 지도를 보는 것이었다. 대중 교통 수단에 익숙했던 일상에서 스스로 운전하여 원하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보니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당시 선배가 차 안에 지도를 꼭 가지고 다니라고 한 충고가 매우 유용했었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지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지도는 땅의 모습을 동일한 비율로 줄여 평면으로 나타낸 것이다. 정확한 측량을 통해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도의 객관성과 정확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의 옛지도들은 거리나 비율 등이 정확하지 않아서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되거나 회화 정도로 무시당하기도 한다.
지도는 말할 것도 정확성이 생명이다. 거리나 면적, 방향 등이 정확하게 표시되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도는 그것이 제작된 당시 사회의 ‘의미로서의 세계’를 기재하고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한 매체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 와카바야시 미키오의 말처럼 생각의 범위를 넓혀 보면 고지도는 고지도대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벌써 오래 전에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지도를 제작한 사람이 있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가 바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김정호는 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조선팔도를 세 번이나 돌았고 백두산에도 여덟 차례나 올랐을 정도로 그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그의 열정과 노력을 감동적으로 전하다 보니 와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이 형편없다는 것은 아니다. 1898년 일본 육군이 경부선을 부설할 목적으로 일본인 측량기술자 1200명과 조선인 2~3백 명을 비밀리에 고용하여 전국을 측량한 후 5만분의 1 지도 3백 부를 만들었는데, 그 뒤 대동여지도의 존재를 알게 된 그들은 그 지도가 자신들이 힘들여 제작한 지도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고 놀랐다는 일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지도가 있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 된 지도는 고구려 고분인 요동성총에 그려진 그림을 꼽고 있으며 단일 지도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지도는 조선 초(1402)에 간행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인데, 놀랍게도 이 지도에는 일본을 포함하여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지도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 후 성종 때는 양성지가 『동국지도』를 만들었고 영조 때에는 정상기가 『동국지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지도들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많은 참고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대동여지도는 여기에 새로운 자료와 방법을 동원해 만든 것으로 우선 그 크기에서부터 큰 차이가 났다. 대동여지도는 세로가 3미터나 되고 남북의 길이는 무려 6.6미터에 이르는 대형지도이다. 김정호 이전에 존재하던 가장 큰 지도는 정상기가 만든 동국지도로 42만분의 1지도였다. 이에 비해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27년 전에 16만분의 1지도인 『청구도』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1861년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같은 16만분의 1 축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청구도가 필사본이었던 데 비해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해 모든 사람이 쉽게 구해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김정호의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동여지도의 또 다른 특징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나누어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한 후,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고, 남북은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으면 연속된 남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기존의 청구도가 가지고 있던 전체의 모양을 한눈에 볼 수 없던 단점을 보완했다. 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는 새로운 지형표시법의 개발, 상세한 하천망의 기입, 일정한 좌표에 의해 일정한 간격으로 지표를 구분한 점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십리척의 모눈금을 이용하여 도면의 도로선에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어서 지도만 보고도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맥으로 표시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지를 추상화시켜 선과 면으로 표시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산악투영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산지를 45도 위에서 투영하여 얻을 수 있는 그림자의 모양을 지도상에 표현했던 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유설』에서 대동여지도의 제작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어 대동여지도가 단순히 위치나 거리 표시의 기능만을 고려한 지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에 정통함은 군사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므로 국방을 위하여 정확한 지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산천의 상황, 수리의 유무, 경지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면 생산을 증대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국난을 당했을 때라도 지리와 민정에 밝다면 강적이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며 평화로운 때에도 그 지식을 이용하여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현대의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담겨 있다. 이용의 문제만을 고려한다면 대동여지도 22첩은 지도사적 가치로 보아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차봉
엘림에듀(Elim Education Center) 대표
관리형 홈스테이 기숙학사
elimedu@gmail.com|972-99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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