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의 억만장자들 “시작은 신문배달부였다”

로스 페로·분 피킨스·앤디 빌·크레이그 홀 등 지역 최고 부자들의 회고담 … 사업과 삶의 교훈 배운 귀한 경험으로 간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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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이그 홀. “팀을 꾸리다”
미시간 태생인 크레이그 홀은 현재 66세로 홀 금융회사의 이사장이다. 그는 고향에서 앤아버 뉴스(The Ann Arbor News)를 배달했다. 그는 당시 4개의 배달 노선을 하나로 통합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18세였던 당시 내가 4천달러를 저금할 수 있는 방법이 신문배달이었다. 이 돈으로 나는 거주할 집을 사는데 다운페이했다”고 회고하는 그는 “형에게도 내 밑에서 신문배달을 하도록 했고, 또 때로 엄마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태우고 내가 신문을 배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신문 배달이 끝나면 나는 잔디 깎는 일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시간당 75센트를 받는 진짜 일자리인 접시닦기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가 배운 교훈도 만만치 않다. 
“형을 고용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아침에 너무 추워서 잘 일어나지 못했고, 때로 구독자들로부터 신문이 제대로 배달되지 않았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친절하지만은 않다는 걸 그는 배웠다. 또 다른 깨우침도 있다. 
“또 엄마가 공짜로 도와준 것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제 깨닫게 됐다.”
그의 신문배달 결론은 이렇다. “크리스마스 보너스 시즌이 되기 전까지 결코 신문배달을 포기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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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킨스. “공략하는 법을 배웠다”
분 피킨스는 홀덴빌 데일리 뉴스(Holdenville Daily News)를 배달하고서 1인당 1센트를 받았다. 
“내 첫 배달 노선에는 28명이 구독자였다. 그래서 내가 벌 수 있는 건 하루에 28센트였다. 1주일에 6일을 배달했다. 다른 비용이 안들고 버는 일이었다”고 BP Capital 이사장인 그는 회고한다. 
“12살이던 나에게 하루 28센트는 매우 큰 돈이었다. 당시 경제불황이었으니 그건 큰 비중을 가진 돈이었다.”
페로처럼 피킨스 역시 구독료를 받아내는데 두각을 보여 신문사의 눈에 띄었다. 결국 그는 더 많은 배달 노선을 신문사로부터 부여받게 된다. 
“그만 둘 때까지 154명 구독자 배달을 담당하게 됐다. 토요일 신문이 발간되지 않았지만 내가 당시 신문 배달로 한달에 버는 돈이 38달러에 이르렀다.”
피킨스는 구독자들의 집 뒷문으로 가면 더 잘 돈을 받아낼 행운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경제불황이어서인지 사람들이 앞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는데 뒷문으로 가면 문을 열어줄 확률이 많았다는 걸 안 것이다. 
그가 자부심을 갖는 것 중 하나는 양 손을 다 이용해 신문을 던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톰소여의 모험’의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피킨스는 신문사의 우편 배송물을 버스 정거장까지 배달하는 일의 책임도 맡고 있었다. 
인쇄소에서 첫 판 신문이 나오면 가장 많은 배달 노선의 책임자에게 주어지는데 이는 피킨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문사 우편을 갖다 나르는 일로 바빴기에 동료 배달부들이 피킨스의 신문을 대신 접어주곤 했다. 그가 당시를 회고하며 껄껄대며 웃는 이유다. 
“그들이 내 대신 신문을 잘 접어서 쌓아주곤 했다. 나에게 ‘인생 참 쉽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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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홀. “현실을 알게 됐다”
메리 케이 회사의 회장이자 CEO인 데이비드 홀은 현재 56세다. 그가 4년간 1970년대 초반의 뉴욕 업스테이트 지역에서 The Schenectady Gazette와 The Knickerbocker News 배달을 시작한 게 11세였다. 
그가 배달한 구독자는 80여명이었고 팁을 포함해 1주에 30달러를 벌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자전거를 몰면서 신문을 접는 일이었다. 또 유리창을 깨뜨리지 않고서 얼마나 멀리 신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보는 일이었다.”
물론 그도 북부 지역의 겨울에 대해서 회상하면 진저리를 치게 된다. 
“정말 힘든 때는 눈이 와서 자전거를 탈 수가 없을 때였다. 특히 추수감사절 다음날, 신문이 각종 속지(inserts)로 인해 엄청 무거운 때, 더 그랬다.”
그가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신뢰성에 대한 것이다. 신문 배달이 안되거나, 늦게 배달되거나, 신문이 젖어있으면 한마디 들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내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난 하루도 빼지 않고 신문을 제 시간에 배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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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시키. “사람들 다루는 기술 익혔다”
애디슨에 본사가 있는 데시키 회사의 CEO인 돈 데시키는 9세였던 1948년에 자전거 신문배달 일을 시작했다. 
“크로포드빌 인디애나 저널(Crawfordsville [Indiana] Journal Review)이 고용한 사람 중에 내가 최연소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현재 데시키는 77세로 8억달러 규모의 트럭 운송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내 배달 노선에는 75명의 독자가 있었다. 신문사에서 신문을 접은 뒤 가방에 넣어 어깨에 들쳐매고서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했다. 그리고 신문을 현관으로 던져넣었다. 때로는 운이 없으면 지붕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당시 그는 1주일에 5달러를 벌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는 힘들었다. 또 구독자들에게서 구독료를 받는 일도 때론 즐겁지 않았다. 특히 돈이 없어서 못내겠다고 계속 미루는 독자들의 경우가 더 그랬다. 그런 완고한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아버지가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때문에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모든 종류의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할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 우리 인생의 현실이다. 그들 모두를 상대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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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노. “서비스 정신의 중요성”
필 로마노가 뉴욕에서 어번 시티즌(The Auburn Citizen)을 96명에게 오후에 배달하는 일로 9달러를 받고 신문배달부로 고용됐을 때 그는 12세의 중학생이었다. 
로마노는 매주 금요일 구독료를 받아내는 일을 했는데, 그 중 9달러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이 돈을 투자했다. 
겨울에 3시간 정도 배달 노선을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추위와 불편을 견디면서 그는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인생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내가 할 일은 현관 앞에 신문을 배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겨울에 현관 앞에는 눈이 쌓여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매주 금요일 구독료를 받으면서 물어봤다. 신문을 문 안으로 넣어주는 걸 해주면 얼마나 더 돈을 줄 수 있느냐고. 어떤 사람은 15센트를 더 주겠다고 했고 일부는 25센트를 주겠다고 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더 못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여성은 뜨거운 초콜릿과 쿠키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뭐든지 좋다고 말했다. 돈을 더 주든 안 주든 나는 그렇게 해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더해주는 것으로 원래 받기로 됐던 9달러 대신 26달러를 받게 됐다. 
“그것이 바로 내 사업가 정신이 시작된 지점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걸 해주고, 그에 대해 그들이 가격을 매기게 한다는 정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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