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아메리카 갓 탈랜트 (America’s Got Talent)”쇼에서 한 참가자가 기막힌 마술 장기자랑을 가지고 나와 패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마술의 기원이 궁금해져서 이리저리 찾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마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1. 신앙같은 마술 = 흔히, ‘마술’이라고 하면 턱시도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비버 햇’이라고 불리는 검정 모자를 쓰고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남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마술은 이런 공연이 아니라, 종교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마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7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메이둠’이라 불리는 마술사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메이둠은 파라오의 궁전에서 파라오가 보는 앞에서 오리의 목을 자른 뒤, 교묘하고 날렵한 손재주를 부려 오리의 머리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고 합니다. 목이 잘렸던 오리가 멀쩡하게 다시 살아서 꽥꽥거리며 돌아다니자 왕실의 관객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메이둠은 그 마술을 더 계발해서 나중에는 소의 머리를 잘랐다가 같은 방식으로 되살려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마술은 거의 종교적인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교묘한 기계장치를 이용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전의 문을 열고 닫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마술을 부리면서 신들이 신전으로 드나드는 것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대사회는 공, 주사위, 화폐(동전), 그릇 등을 사용해서 마술을 만들어 냈는데, 마찬가지로 그 목적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마술사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성에 사는 마술사였습니다. 그는 시장에서 신기한 마술을 부려 사람들의 마음을 호려서 이익을 취하던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는 회심하게 됩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카드마술은 중세시대에 들어와서 최초로 나타났습니다. ’타로’라고 불리는 카드를 이용해서 점괘를 읽는 소위, ‘타로점’에 쓰이는 카드 그림에도 어김없이 마술사가 등장합니다. 카드 속의 마술사는 사도행전의 시몬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손재주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마술사들은 종종 주술을 행한다는 의심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마녀사냥(Witchcraft)도 이 관행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엄격했던 중세의 카톨릭 신앙을 염두에 둔다면 짐작할 수도 있는 모습일 것 같습니다.
2. 눈속임의 마술 = 영국의 마술사 ‘래지널드 스캇’ (Reginald Scot)은 마술사들이 처형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1584년에 수많은 마술사들의 트릭들을 밝히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마술이 주술이나 마법과는 다른 것임을 입증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술이 물리 실험의 일종으로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기 시작해서 마술사들은 물리학자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 시기부터 마술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것이죠.
근대 마술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19세기, 프랑스의 마술사 ‘로베르 우댕’ (Jean-Eugène Robert-Houdin)은 프랑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공식적인 임무를 받아 종종 아프리카로 파견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아프리카의 주술사들을 훨씬 능가는 마술을 보여주어서 그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고합니다. 앞서 말한 ‘마술 공연’이 시작된 것은 이 때부터였습니다.
같은 19세기, 헝가리 태생의 미국인 마술사 ‘해리 후디니’ (Harry Houdini)는 온갖 종류의 트랩에서부터 탈출하는 마술을 선보여서 “탈출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후디니는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마술사였습니다. 자신의 탈출 마술이 트릭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잘 알았던 탓인지, 후디니는 영계(靈界)를 부인하며, 심령술이나 영매술(靈媒)은 모두 마술과 다를 바 없는 트릭이라고 치부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명한 심령술사들이 거짓임을 밝혀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조지 발렌타인, 미나 크래돈 등).
3. 눈속임과 믿음 = 잘 알다시피, “백문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로서, ‘직접 경험하는 것이 가장 확실히 아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술의 세계로 들어오면 우리는 뻔히 “보고도” 속습니다. 굳이 현란한 마술사까지 부르지 않더라도, ‘착시현상’과 관계된 그림 몇 장만 들여다보아도 그림에 없는 게 나타나기도 하고, 있는 게 사라지기도 하고, 실제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눈’이라는 것이 철썩같이 믿을 만한 도구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오감(五感)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직접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게 될 수많은 사람들이 더 복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29절).
아이러니하게도, 영계를 그토록 부인했던 후디니도 일말의 의구심(혹은 믿음)이 남았었는지, 자신이 죽어서 영(靈, ghost)으로 나타난다면 아내가 알아볼 수 있도록 “로자벨 빌리브” (Rosavelle Believe)라는 암구어를 말할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고요한 가운데서 눈을 감고 오감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신자겸 목사
하나로교회담임
972-488-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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