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각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칭호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부를 때 성과 이름을 같이 부르게 되는데 그 중 성씨는 혈통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어서 그 가족이나 혈족에 속하는 성원권(membership)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대에는 성씨가 갖는 영향력은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사용된 것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성씨를 사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인 위만 조선 초기로 올라간다. 중국의 역사책에 “위만이 일으킨 정변으로 쫓겨난 준왕이 한(韓) 땅에 들어가 왕을 칭하자 고조선에 남아있던 아들과 친족들이 한(韓)을 성씨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韓)’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가 된다.
그런데 또 다른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준왕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주나라 무왕의 명을 받고 조선의 제후로 온 기자(箕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준왕의 성은 본래 기(箕)씨였다는 말이 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기자를 시조로 하는 행주 기씨와 청주 한씨는 같은 성족으로 인식되었고, 역시 기자를 시조로 하는 태원 선우씨도 분화한 성씨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준왕이나 기자에 관련된 중국 쪽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시기부터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최초의 성씨 사용 시기는 삼국시대 중반 이전으로 올라가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책에는 삼국을 세운 시조가 건국 당시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처럼 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시조 주몽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高)’씨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의 시조 온조는 부여 출신이라 ‘부여(扶餘)’씨라 칭하였으며,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는 ‘박(朴)’을 각기 성씨로 삼았다고 전한다. 가야에서도 시조 수로왕이 ‘김(金)’, 왕후가 ‘허(許)’씨의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후대에 기록하면서 시기를 끌어올린 것이 많기 때문에 이들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신라를 예로 들자면 ‘김’이 왕의 성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6세기 중반인 진흥왕(540∼576) 때로 보인다. 진흥왕이 중국과 교섭하면서 ‘신라국왕(新羅國王)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 최초의 공식 사용례이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도 건국 초기부터 성씨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다만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볼 때 일찍부터 중국과 교섭하고 있던 고구려에서는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3세기 말 무렵에 씌어진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에 고구려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성씨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서의 성씨 사용도 3세기 후반 이전으로 올라가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성씨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사용층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에는 많은 성씨가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전설적인 요소들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더욱이 족보라고 하는 것이 종친 내부에서 자의적으로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색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기재 내용을 사실로 확인할 근거도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족보류의 기록을 제외하면 삼국에서 사용된 성씨는 얼마 되지 않는다. 세 나라 모두 약 20개 안팎의 성씨가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나마 대부분이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 사회 변동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자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은 마치 유행처럼 저마다 성씨를 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현저해져서 고려 중기에는 일반 양민들도 대부분 성씨를 갖게 되었고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천민층에 이르기까지 성씨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제정되어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적으로 성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성씨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로, 1782년에 간행된 『증보동국문헌비고』의 씨성조에는 당시 전국에 무려 496개의 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240개, 『동국여지승람』에 277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성씨의 보급이 천민층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한 조사 자료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 자료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성씨는 모두 274개로 조선 전기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가 없던 천민층이 새로운 성씨를 가졌다가 가문의 혈통을 상징하는 성씨의 성격을 고려하여 기존의 양반 성씨로 회귀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족과 귀족층에서 한정적으로 성씨를 사용했던 시대에는 성씨가 특권 집단의 상징이면서 특권층 내부의 구별장치이기도 했지만, 성씨의 사용이 모든 계층으로 확대된 지금 특권으로서의 의미는 사라졌다. 다만 혈통을 상징하는 의미가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조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따라서 개인이 평가되는 시대로 변한 지금 굳이 성씨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차봉
엘림에듀(Elim Education Center)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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