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목사가 작고한 자신의 부친 이야기를 했다. 장수(長壽)하다 돌아가셨단다. “아버지는 항상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이제 다 하늘나라에 갔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오래 사신 것이죠. 그래서 아버지는 ‘나도 이제 빨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더 있다 가면 하늘나라에 있는 친구들이 나는 천국에 못 오게 된 줄(I didn’t make it)로 믿을테니까’라면서요.”
슬며시 웃게 되는 조크다. 노년도, 죽음도 농담으로 즐기는 미국인다운 여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3대 거짓말 중 하나인 노인들의 ‘빨리 죽어야할텐데’의 반전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이런 꼴까지 다 보니 말야’라고 한탄하는 부모 세대를 겪었다. 그리고 무시했다. 그 깊은 한탄에 담긴 고독과 또 그만큼의 삶에 대한 미련들을.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 졸업축사에서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천당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천당 가기 위해 죽는 건 싫어한다”고. 그런 그도 56세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성경의 시편 기자도 장수를 열렬히 신에게 기원했다. 재물과 함께 장수를 인간의 최대 축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 장수가 무조건 축복이 아니다. 행복한 장수가 아니면 그건 더 비참한, 죽지 못해 사는 고단함의 연장일 뿐이다. 노년의 고독사가 증가하는 게 그 증거다. 허형만 시인이 ‘무심에 관하여’에서 말한 노년의 모습 “늙어간다는 것은 고독해진다는 것이리라/ 고독해진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리라”가 맞다.
유엔 기준으로 인구 7% 이상이 65세면 고령화 진행 사회(Aging Society), 14%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ed Society)에서 한국은 지난해 13.1%로 고령화사회에 급속히 진입 중이란다. 한국인 중간 연령도 처음으로 40대로 올라선 41.2세가 됐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평균 연령이 급속히 높아졌다는 것.
문제는 아름다운 노년과 말년을 꿈꾸는 이들에게 사회는 준비가 덜 돼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돈 없는 노년은 슬프지만 돈만 있는 노년도 ‘호구’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돈이 있어 노년의 고독과 무시를 잠깐 되돌려보기도 하지만, 역시 노인은 노인일뿐이라는 사회 냉대와 무관심은 어쩌지 못한다.
문해피사(文海披沙)라는 글에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로 하는 일의 목록이 있단다. 가령 밤에는 잠을 못 자고 낮에 깜빡깜빡 존다든지, 아들은 사랑하지 않고 손자만 사랑한다든지. 특히 최근 일은 기억 못하고 아득한 옛일만 추억처럼 생각난다는 말은 실감난다. 또 울 때는 눈물이 안 나고 웃을 때 눈물이 난다는 말도, 가까운 것은 안 보이고 먼 것이 더 잘 보인다는 말도. 온 몸이 가만히 있으면 여기 저기 저리고 아픈데, 지압과 같은 것으로 맞으면 오히려 시원해지는 고장난 육신. 화장실에 가면 쪼그려 앉기가 힘든데 인사를 하려다 무릎이 저절로 꺾어지기도 한다.
시인의 말처럼 노년은 마음의 빗장을 열기가 힘들다. 소심해지고 예민해져서 화도, 짜증도 는다. 끈 떨어진 자괴감에 우울증도 생기고, 손상된 자존감에 행패 부리는 ‘폭주 노인’도 늘어난 현실이다.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젊고 일할 때 명함으로 사귀던 이들은 허상에 불과했다. 진정한 인맥이 아니었다. 사람 그 자체와 사귀는 진정한 인맥 형성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능란하다. 늙어갈수록 인맥이 두터워 친구랑 밖으로 도는 아내를 기다리는 인맥 없어진 남편 모습도 노년의 자화상이란다.
무엇으로 노년의 시기를 우아하게 보낼까. 인내심과 해탈이면 될까. 옛 선인이 말했다. “우리는 감인세계(堪忍世界)에 태어났다.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참고 견디며 살다가, 참고 견디다 죽으니 평생이 온통 이렇다”고.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出世間), 세상의 파고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벗어난다는 뜻도 다른 대단한 세상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고 일체의 일이 모두 허무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란다.
결국 깨닫는 것, 세상 이치를 깨우쳐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그 해답일 것이다. 명심보감에서 “못난이들 화가 나 성내는 것은 모두 다 이치가 안 통해서다. 마음에 이는 불을 가라앉히면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이 된다”는 말을 되새겨 볼만하지 않을까.
대명절 한가위다. 한 해 수확의 계절에 삶의 수확을 마치고 깨우침의 세계에 돌입한 노년들을 기려본다. 그들의 행복에 열렬한 격려 박수도, 그리고 그들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I did make it!”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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