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그림 속엔 낡은 자전거가 나무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서있다. 누군가 포장되지 않는 시골길을 지나다 잠시 쉬어가는 듯 보였다. 흐드러지게 핀 분홍 빛 벚꽃나무는 하늘을 이고 마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인양 의젓하게 서 있었다. 작품준비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고 있는 화가를 보며 참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속의 벛꽃나무는 추억의 장소로 나를 옮겨다 주었다. 커다란 나무를 볼 때면 빛 바랜 추억과 그리운 교정 그리고 큰 느티나무가 영화 장면처럼 떠오른다.
여고시절, 국어 선생님이 좋아서 문예반에 들어갔다. 문예지 발간을 돕는다는 핑계로 방과후면 미술 실보다 문예반을 더 들락거리곤 했다. 문예반 책장에 가득 쌓인 책들, 선생님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원고지, 소설 속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거기 있어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우리는 교정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선생님이 들려주는 문학이야기를 경청하곤 했다. 일제시대 때 심은 백 년 넘은 느티나무는 겨울이나 장마철을 제외하곤 문예반 학생들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세 갈래로 가지가 나뉜 느티나무는 애꿎은 남학생들에 의해 칼로 긁히고 가지가 뿌려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지만, 사춘기 청소년들이 꿈을 이야기하고, 시를 외우고,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그런 느티나무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교수님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여고시절 교정의 느티나무 아래서 시를 외우며 선생님을 기다렸던 일이 떠올랐다. 선생님과 문학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매주 시 한편씩을 암기하여 선생님 앞에서 자랑 삼아 낭송하곤 했었다. 의미도 모르면서 분위기 잡고 낭송하던 내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워 고개가 숙어진다.
지난 해 수필로 인연을 맺게 된 권대근교수님을 달라스에 모시게 되었다. 지난주 행사를 마친 ‘제1회 텍사스한인예술공모전’ 문학 부분의 심사를 맡아주셨던 교수님이 마침 한국문인협회의 ‘해외한국문학심포지엄’ 행사를 위해 워싱턴 방문을 하였던 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족한 내 글에 진솔한 평가를 해 주셔서 한국에 방문하게 되면 꼭 찾아 뵈려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문학에 관심 있는 지역인들을 위해 수필강연회를 기획하고 싶다는 제의에 달라스 방문을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교수님을 뵌 순간 오래된 스승님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움 가운데 강인함이 배어있는 첫 인상에서 친근함에 푸근함이 느껴졌다. 달라스에 계신 동안 일정의 강행군으로 생긴 관절염 때문에 발을 절면서도 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주셨다. 마지막 날의 수필강연은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명 강의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이라는 편견을 제대로 바꿔 준 시간이었다.
강연 시작 전 강단에 오르신 교수님께서 인사말을 못하고 목이 메이셨다. 행사장 안에 전시되어있는 그림 한 점을 보시며 어머니생각에 마음이 아팠다는 교수님이 어린 시절 힘들었던 생활고를 들려주시다 이내 눈물을 보이셨다. 경청하는 이들 모두가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감성이 있어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강연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예술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기본방식은 결국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같았다. 작곡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제를 향한 제재의 뒷받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글자를 통해 만들어진 에세이가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림은 바로 색과 터치 등 미술 재료를 통해 제작되는 에세이이다.
며칠간 교수님과 함께 일하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훌륭한 스승이 내 뒤를 받쳐주고 있는 것 같아 든든했고, 문학에 대한 사랑도 더 깊어졌다. ‘누구나의 문학’이 아니라 ‘누군가의 문학’이 바로 수필이라고 강조하신 교수님의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는 날이다.
크고 든든한 느티나무가 생겼다. 내가 가야 할 예술의 길에 그늘이 되어주신 교수님과의 인연이 새삼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 느티나무 아래로 길을 안내해 준 박작가님이 마냥 고맙다. 오늘은 박작가님을 만나 차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눠야겠다. 내게 주어진 날들이 오늘처럼 매일 맑음이었으면 좋겠다.
문 정
MFA. Academy of Art University San Francisco
The 8th university (Universite, Paris-VIII)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조선대학교 미술 대학원
국립 목포대학교, 광주 교육대학교, 국민 대학교 강사 엮임
개인전 3회 및 국내외 그룹전 및 공모전 다수
현) 드림아트 미술학원 원장, H Mart 문화센터 원장
Tel. 469-688-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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