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형(荊)나라 사람이 활을 잃고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형나라 사람이 잃은 것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터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내가 찾으려고 애쓸 것인가?”
이 말을 듣고 공자(孔子)가 말했다. “‘형’이란 말을 빼는 것이 어떤가?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줍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듣고 노자(老子)가 말했다. “‘사람’이란 말을 빼는 것이 어떤가? 어차피 천지의 것이 천지에 있지 않겠는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전해지고 있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자의 생각에 비추어 보면 형 나라 사람은 소인배이고, 노자에 생각에 비추어 보면 공자 또한 소인배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내 것’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시야를 넓혀보면 ‘내 것’에 대한 애착이 부질없는 집착으로 보일 때가 있다. 법정 스님이 주장했던 ‘무소유’가 잔잔한 감동을 주지만 그렇게 살아가기에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욕심이 많다. 그러한 삶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삶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욕심을 줄일 수는 있어도 욕심을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보통 사람들은 ‘내 것’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 없다. 다만 좀 더 마음을 넓게 가지고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 것’에 대한 집착으로 시야를 넓혀가는 공자의 생각이 노자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선은 늘 앞과 아래에 머물러 있다. 땅에서 하늘을 보기는 하지만 하늘에서 땅을 보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좁은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고의 틀이 이기적이 되기는 쉽지만 우주적이 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도 우주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고,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도 ‘서시’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생물을 어우르는 우주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육사 또한 우주적 시각을 가졌던 인물 중의 한 사람임을 그의 시 ‘광야(曠野)’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까마득한 날, 태초로부터 천고(千古)의 뒤까지 영원의 시간을 한 편의 시에 압축해 놓았다. 시간 관념뿐만 아니라 공간 의식도 무한히 확대되어 하늘, 바다, 산맥, 강 등이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육사가 이 시의 제목을 ‘광야(廣野)’라 하지 않고 ‘광야(曠野)’라고 붙인 데에는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과 그것을 읽는 자신의 시대 정신을 함께 담을 수 있는 단어로 후자가 더 적합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고, 이러한 시간적인 무한성과 공간적인 광활성을 한 줄 시에 담을 있었던 것은 육사의 시야가 그만큼 넓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절망적 상황에서도 ‘매화 향기’를 맡으며 언젠가는 피어날 ‘노래의 씨’를 뿌리는 시인의 마음은 다시 천고의 뒤 그 노래를 불러줄 초인이 올 때까지 그 넓고 거친 광야를 지키다가 비로소 나타난 초인의 입을 통해 희망의 찬가를 부르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과 땅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만 가진 사람의 사고는 차이가 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동산에 올라가서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천하에서 가장 높다는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가 작다고 했다. 금강산 비로봉을 오르면서 노나라도 넓게 여기는 우리에 비해 천하를 좁다고 한 공자의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한탄한 송강 정철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등산을 해 본 경험을 생각해 보면 높이 올랐을 때 우리가 넓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좁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시야의 넓고 좁음에 따라 보이던 것이 안보이기도 하고,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시야를 땅에다 고정시키면 미운 사람이 있고 고운 사람이 있다. 얼굴의 점도 보이고 덧니도 보인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개미처럼 작게만 보일 뿐 밉고 곱고의 차이가 없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도 그저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곧 사고의 틀을 넓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 까닭이다.
동양철학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들고 있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에 보면 한글의 모음은 이 삼재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시각이 우주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게 된 한글을 창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이차봉
엘림에듀(Elim Education Center) 대표
elimedu@gmail.com|972-99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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