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감독과 여배우와의 불륜이 화제다. 감독의 아내가 억울함을 호소해서 여론은 뭇매질에 나섰다. 단순 불륜이 아니라 이혼까지 하겠다고 해서 더 욕먹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영화들을 좋아했던 터라 마구 욕하기도 뭐하다. 또 이미 나쁜 사람들로 낙인 찍힌 상태라 내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다. 다만 이런 뉴스 들으면 그 흔한 ‘남불내로’가 생각난다.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영화니 소설이니 드라마니, 막장으로 인기몰이 하던 내용에서 자주 소재가 되는 불륜이다. 때론 그게 사랑으로, 간절함으로, 애틋한 스토리로 포장된다. 그걸 보며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하고, 감정이입도 하고, 또 대리만족으로 떨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누가 그랬다 하면 돌부터 날리게 된다. 드라마와 현실에 대해 이중잣대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역으로, 누가 봐도 수치스런 불륜과 치정을 미화하는 교묘함도 인간은 갖고 있다. 돌팔매질 받을 자신의 치정 막장을 멋있는 러브 스토리로 포장해내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걸 소설이니, 영화니, 자서전이니, 연재니 자화자찬의 소재로 남용하지 않는가.
사실 남불내로는 정치계에서 애송되던 말이다. 자기 당이 하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이요, 타 당이 하면 무조건 나라 말아먹을 매국적 행위로 매도하는 정치판세를 비꼰 것이다. 적반하장과도 상통하는 이 말이 정치계만 꼬집는 말이겠는가. 인생 살다보면 수없이 보는 일이다. 가깝게는, 자기 신문사가 하면 좋은 일이요, 다른 언론사가 하면 똑같은 취지의 행사도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부터 해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자기가 하는 애먼 지적질은 대단한 글인 냥 착각하고, 반대로 자기 지적하면 옳은 말이라 해도 개소리라고 욕질하며 달겨드는 건 또 어떻고.
이는 서 있는 곳에 따라 보는 게 달라진다는 입장(立場) 때문이다. 서로 다른 걸 인정하고 존중하면 될텐데 자기 시각만 고집하는 병이다. 역지사지가 안 통하는 꽉 막혀 삐뚤어진 정신 세계는 육신의 비틀림보다 더 심한 병이다. 그건 그걸로 밥벌이 하다못해 앵벌이하는 이들의 전형적 추락의 형태다.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부러져버린 장애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한때 ‘스타’였던 켄 스타 특별검사가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당시 성스캔들 수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터럭 하나도 안 놓치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임무를 완수한 그는 스타가 됐다. 클린턴 대통령 가족에게는 최대 악연이었을 터. 나중에 자신의 수사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다. 특히 클린턴 전 대통령의 업적이 많았는데 성스캔들의 렌즈로만 보게 해서 미안하다”는 후회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후에 웨이코 소재 베일러 대학의 총장이 됐다. 그런데 얼마전 해임됐다. 해당 대학 풋볼 선수들의 여학생 성폭행 신고 처리와 조사를 대충 하도록 방치한 것 때문이다. 대통령 뒤를 신명나게 조사해 까발리던 그가 자신의 대학 학생들 성폭행은 쉬쉬 덮으려 했다. 더 이상 스타도, 정의도 살아있지 않았다. 안으로 굽다 부러진 팔, 부러진 명예뿐.
진실과 진리가 나에겐 무엇이던가. 불경은 진리에 대해 깨우친 자에게는 진리지만 깨우치지 못하고 길잃은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장애’라 했다. 성서도 말한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그러나 진실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는 이는 어둠과 가면을 부둥켜안고 살 것이라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작시 ‘악한 자의 가면’에서 황금색 칠을 한 일본산 목제품 악마의 가면을 묘사한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참 통쾌한 일침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나와 대척된 이들의 자기 감춤의 처절한 몸부림마저 이해된다는 그 말이. 그들의 비밀, 비리, 속셈 알지만 그걸 감추려 짖어대느라 실핏줄 터지는 거 안쓰럽게 봐주라는 말. 그래서 또 다른 시인 정현종은 ‘가객(歌客)’에서 무심히 읊었다. “무슨 터질 듯한 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이라고.
그 맞장구인가. 공광규 시인은 “불륜 남녀가 놀러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뭔 일에도 화도 안 내고 칭찬도 안하는 수백 사찰 불상들을 한심하다”더니 “나도 이 바람 속에서/ 한심하게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안다. 여기서의 바람은 남녀의 그 ‘바람’이 아닌 걸. 그건 비움이다. 내려놓음이다. 초월과 자유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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