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박지에 겹겹이 쌓인 액자를 풀어헤쳤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긴 여행을 다녀온 자식을 맞는 것처럼 설렘이 앞섰다. 오랜만에 그룹전시회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고 나서 이곳 달라스가 아닌 먼 거리로 작품이 운반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한참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엎친데 겹친다고 전시회 기간 동안 내내 몸살감기로 시달리다, 결국은 작품만 먼저 보내고 오프닝 행사에도 참석을 하지 못했다. 전시 기간 중 꼭 방문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작품마저 직접 회수하지도 못했다. 마침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오늘에서야 주인 없이 전시회를 장식하고 온 작품들을 전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학시절에 조교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각 교수님들의 전시회 때마다 장거리를 이송해야만 했던 작품포장에는 익숙하게 훈련이 되어있던 터라 웬만한 미술품 포장에는 나름 전문가 못지않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이번 휴스턴에서 전시될 ‘남서부미술가협회’ 회원전시회에 보낼 작품을 포장하는 나를 보며 강사들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이삿짐 싸는 것 같아요”하며 한마디씩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이 운반되는 과정에 어떤 충격에도 손상되지 않도록 단열제로 사용되는 두꺼운 이중 은박지로 액자 케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림에는 초벌 포장으로 에어폼을 이용하여 몇 겹을 칭칭 감았던 것이다. 대형 그림인 탓에 택배로도 전달하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다른 트럭에 부탁해야만 했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근 3주 만에 내게 돌아온 작품들의 포장은 대체적으로 양호해 보였다. 하지만, 위, 아래를 화살표까지 매직으로 그어가며 “Open here”라고 표시해 놓았던 곳과는 아랑곳 없이 은박지 옆을 뜯어서 액자를 꺼내었는지 테이프로 너덜너덜하게 땜질을 한 모습이다. 다행히 액자와 그림에는 손상이 없어서 감사했다.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흔히 자신의 작품들을 자식이라고 표현한다. 전시회를 통해 그림이 판매되거나 혹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여 납품할 때면 자신의 소유를 벗어난 그림을 출가시킨다고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이 누구에 의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기록해 둔다. 이번처럼 부득이한 상황에 작가의 참여 없이 작품만 보내질 때는 작품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밤늦게 귀가하지 않는 딸아이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마음을 조아리며 기다리게 된다.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작품 중 유독 내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다. 혹시나 전시 기간 중 문의가 있을 까봐 “Not for sale”을 하단부에 붙여 놓았었다.
작년 늦가을 해질 때의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운전해 갔던 “Lake Ray Hubbard”의 노을을 그린 작품이다. 끝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의 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마음이 답답해지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워질 때면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그날도 추수감사절 연휴를 집에서 조용히 지내다 문득 드라이브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해가 내려앉고 있는 서편 하늘이 하나 둘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동의도 없이 무조건 호수를 향해 운전했다, 도착하기 전에 해가 떨어져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도착한 호수의 저녁노을이 바로 내 작품 속에 표현된 그대로의 보랏빛 하늘이었다. 서로 보색관계인 짙은 노랑색과 청보라색이 하나가 되어 어울려져 있는 하늘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건 위대한 창조주의 능력 그 자체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을 때까지 서편 하늘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화판 위를 보라와 노랑으로 장식했다. 그렇게 그날의 나의 심장을 뒤흔들었던 호숫가의 저녁을 며칠 동안 붓과 씨름하여 그림 한 점을 완성했다. 그리고 작업노트에 “One Day, 물결이 삼켜가는 노랑을 껴안은 체 보라는 검게 물들어 간다……”라고 일기를 적었다. 누군가는 단순하고 어둡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나의 심장은 여전히 그날처럼 쿵쿵거리며 뜨거운 열정이 용솟음친다.
나의 그림 속에는 보라색 하늘이 자주 등장한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보라색이 들어있는 그림이 미술실에 걸려있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이건 문정이 그림이네.”하며 말을 건네곤 했다. 특별히 남보라색(Dioxazine Purple)을 좋아해서 그림 어딘가엔 꼭 한 점이라도 보라색을 넣게 된다. 이제 자연스럽게 습관 아닌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며칠 전부터 문화센터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있는 성인반 클래스 회원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자연을 주제로 하는 이번 전시회는 풍경이 대부분의 작품이지만 같은 주제를 다뤘는데도 보여지는 이야기는 가지각색이다. 아직은 습작의 단계인 회원들도 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색상표현으로 자연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원들의 열정 어린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 놓고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누군가 나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꿈을 이야기해 나갈 수 있다면 내 삶 가운데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스스로에게 겸연쩍은 칭찬의 말을 건네 본다.
‘잘하고 있는 거야, 힘내!’
이번 주말엔 아이들과 함께 “Lake Ray Hubbard”로 저녁노을을 보러 가야겠다.
문 정
MFA. Academy of Art University San Francisco
The 8th university (Universite, Paris-VIII)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조선대학교 미술 대학원
국립 목포대학교, 광주 교육대학교, 국민 대학교 강사 엮임
개인전 3회 및 국내외 그룹전 및 공모전 다수
현) 드림아트 미술학원 원장, H Mart 문화센터 원장
Tel. 469-688-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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