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영 l 지구 떠나기

80년 대 개그 프로의 유행어들 중, '지구를 떠나거라아아~'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뭐라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조적으로 던지는 유행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엔 뭐가 그리도 재미있었던지 툭하면 여기 저기서 '지구를 떠나거라아~' 타령이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특히나 조국을 떠나 온 낯선 이민 생활 속에선 이렇게 지구를 떠나버리고 싶을만큼 당혹스럽지만 달리 대안이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에겐 낯선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지구를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들의 연속이니까요. 안 들리는 귀, 안 열리는 입, 어렵게 입을 열어도 도무지 못 알아듣는 상대방. 정말 수증기로 증발해 사라져 버리고 싶은 당혹스러운 순간들의 연속이니 말입니다. 적응을 좀 했나 싶어도, 모든 것이 다른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공부를 해 학위를 받아야 하거나,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을 키워 내야 하는 그 책임감이란. 게다가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 채워진 체류 신분이라는 무거운 족쇠는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지구를 떠나버리고 싶은 상황들을 풍성히도 제공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도착하자마자 맞벌이 생활 전선에 던져진 엄마들의 경우, 지구를 떠날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도망가 버리고 싶은 버거운 현실과 마주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기본형 스트레스에 병마나 사건 사고와 같은 특가형 스트레스가 더해지기도 합니다.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댈 친척이나 친구가 없고, 이런 저런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달 수입으로 그 달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비상 상황이란 곧 지구를 떠나고 싶은 상황이곤 합니다.
슬초맘도 최근 몇 달 동안 지구를 떠나고 싶은 순간들을 겪었습니다. 슬초빠가 퇴원한 후, 슬초맘도 이제 정신을 좀 차리려나 했더니, 이젠 슬초맘이 십 몇 년 만에 천식이 도져서 병원 신세를 지며 몇 주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증세가 좋아져서 호흡 치료기를 떼고 만세를 불렀더니만, 이번엔 슬초 이모가 갑자기 자동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사람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박살난 차량과 사고 후유증으로 비실비실하는 슬초 이모를 보고 있노라니 머리 속에 조용히 한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지구를 떠나거라아~'.
잠시 치열한 현실이 아닌 조용한 안드로메다에서 리셋을 하고 돌아와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안드로메다를 찾아야 할 때면, 높은 산이나 탁 트이고 깨끗한 바다를 찾습니다. 보다 젊었을 땐 둘이서 높은 산에 올랐었는데, 이제 40대가 되니 파도 소리나는 바다가 참 좋습니다. 해변에 앉아만 있어도 파도 소리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정리되고 말이죠. 그래서 잠시 동안의 안드로메다 방문은 슬초맘에게 일상에서의 온갖 난관들을 정면으로 바라 보며 걸어 갈 수 있는 힘과 여유를 주곤 합니다. 그런데 텍사스 공화국에 살다 보니 달려도 달려도 광활한 텍사스 벌판 뿐이라 큰 맘을 먹어야 산과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난관이 있기는 하더군요.
이렇게 가끔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에 다녀 오곤 하며 지낸 지난 이민 생활 15년. 어느덧 이민 초창기 시절 지구를 떠나고 싶던 상황들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상들이 되었습니다. 그간 엄마만큼이나 키가 커져 자라 버린 슬초만큼 슬초맘의 이민 생활 맷집도 강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산 넘고 물 건너 텍사스를 벗어나 드디어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있어도 이젠 직장 일과 교회 사역과 각종 집안 일로 빵빵 터지는 분주한 현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슬초네 강아지 세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의 눈동자까지 아롱아롱... 이젠 지구를 떠나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지구인 슬초맘이 있을 곳은 지구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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