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매우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6장과 5장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3-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재미있습니다. 한 구절은 선한 일을 할 때 아무도 모르게 하여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상이 쌓이도록 하라고 하는 반면, 다른 구절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할 때, 드러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영 헷갈립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자세히 다시 들여다 보면 명백히 다른 두 가지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행위 자체에 대한 드러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한 결과 및 영향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3-4절은 선한 행위를 한다는 사실로 칭찬을 구하고 다니는 행위에 대해 경계하지만, 마태복음 5:14-16절은 선한 일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영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격은 이 ‘선한 영향력’에 대한 좋은 예로 ‘빛’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 속에 들어갈 때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지만, 그 결과는 감추려해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두움 속에 들어감과 동시에 위로, 아래로, 그리고 동서 남북으로 방사적으로 빛을 발하여 어두웠던 곳을 밝히기에 그 결과는 가릴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빛 외에도 ‘소금’이라는 좋은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디든 뿌려지기만 하면 소리 소문없이 주위를 짜게 만드는 소금 역시도 빛 만큼이나 선한 영향력의 좋은 예로 사용됩니다.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빛과 소금. 듣기는 참 좋고 아름답지만, 문제는 빛이 빛이 되고 소금이 소금이 되려면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는 것이 심난합니다. 그것은 바로 빛은 어두움 속에 거해야 비출 수 있으며, 소금은 녹아야지만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에는 ‘희생’이라는 전제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유사 기독교인 ‘개독교’라는 현세적 기복 종교에는 서로만을 휘황찬란하게 비추는 화려한 빛들, 서로 들러붙어 단단히 굳어버린 암염들이 그득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미국 티브이에서 남어빙 수학 공부방으로 취재를 나온다고 합니다. 만 3년 전부터 성인 스탭들과 어린 중고등학생 봉사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도움이 필요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봉사 활동을 시작한 것이, 유급을 반복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우등생이 되며 지역의 공립 학교들에 소문이 나고, 또 그 소식이 여러 루트를 거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아름답고 훈훈한 지역 봉사의 소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봉사자로 섬겼던 슬초만큼이나, 한 때 잠시 스탭으로 섬겼던 슬초맘에게는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주 5일을 힘들게 일하고 와서, 토요일 아침마다 늦잠에 대한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고 먼 곳까지 나와 어린 학생들을 섬기던 성인 봉사자들과, 각종 생일 파티, 프로그램, 학원 수강을 포기하고 참석하여 일 인당 2-3 명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고등학생 봉사자들의 마음와 상황을, 그들의 희생과 녹아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별 것 아닌 동네 봉사 활동조차도 주목을 받게 되는 그런 각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하지만 빛과 소금이 되어 어두움에 거하고 자신을 녹여 주어진 땅을 비추고 짜게 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이제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된 남어빙 수학 공부방의 모든 스탭들과 어린 봉사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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