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식들이 마무리됐다. 올해 하버드 대학 졸업식 연사는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그는 매우 영화스런 명제를 던졌다. “악당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버드 졸업생들은 모두 영화 속의 영웅들처럼 돼야 한다”는. 그가 말한 세상 ‘악당’들은 인종차별, 동성애혐오, 인종증오, 종교 및 계층간 증오를 말한 것이다. 유대인인 그도 어려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차별과 증오를 극복하려면 “고통스러운 문제를 외면하는 대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연구하고 결정적 순간에 영웅처럼 해결사로 나서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 공부만 잘 하고 입신양명해 이름만 날리는 게 다는 아니라는 충고다.
같은 맥락의 유명한 졸업 축사 하나가 있다. 오래전 웰슬리 고교 축사를 했던 한 교사의 연설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깃발을 꽂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보이듯, 동성애혐오 총기테러가 올랜도 게이클럽에서 발생했다. 이슬람 테러 단체를 추종하는 극단주의자가 일부러 게이클럽을 찾아가 총격을 해댔다. 사망자가 50명, 미국 최악의 총기사건이다. 버지니아 공대에서의 조승희 총격 사건 사망자 32명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덕분에 조승희는 더 이상 ‘최악’이라는 불명예를 벗게 되는 ‘의문의 1승’을 거뒀다.
올랜도 총기 사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조차도 ‘포기한 듯한’ 연설을 했다. 어떻게 해도 막지 못하는 ‘외로운 늑대’들의 테러에 대해 이제 자제를, 평화를, 대비를 하소연해도 소용없다는 걸 안 것이다. 오바마 재임 7년간 총기 난사 사건이 14번이었다. 매년 두번꼴로 하는 총기 테러 관련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할 말도 없을 터. 총기 소유를 헌법상 보장해놓고, 안전을 부르짖었으나 소귀에 경읽기가 된 셈이다.
그렇다고 미국 여론이 대통령에게 그 책임을 돌리진 않는다. 희생자가 된 동성애자들도 정부를 비방하지는 않는다. 책임지라며 희생양을 찾느라 또 다른 분열과 반목을 만들어내진 않는다는 것.
한국은 테러가 발생하면 책임 전가부터 한다.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인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라고 남성들이 통째로, 또 그걸 막지 못한 정부가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사과든, 대처든 발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與)는 ‘침묵한다’고 욕을 먹고 또 야(野)는 분노의 불길을 더 키워 ‘반목 조장의 기회로 삼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악순환이다.
독일의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고. 각종 혐오 범죄의 희생자들은 가엾은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그냥 둬도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데, 눈물을 닦아주기보다는 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가하는 일은 인간 말종이나 할 짓이다.
이 와중에 또 다른 인간 말종 횡령사건 보도가 줄잇는다. 일본에서 ‘흙수저’ 성공 신화 주인공으로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도쿄 도지사 이야기다. 불우한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스토리 때문에 인기 절정이었던 그였지만 알고보니 정치자금을 개인 돈처럼 마구 써댄 ‘도덕적 해이’의 장본인이었다. 어려운 환경 이야기를 눈물로 팔아먹었고, 그래서 그를 돕고자 후원한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다. 당연히 그는 사임했다.
한국은 어떤가. 수조원의 부채로 인해 침몰 중인 대우조선의 한 간부가 8년간 180억원을 빼돌려 화려한 이중생활을 즐겼단다. 구제해보겠다고 나랏돈을 천문학적으로 쏟아부었더니 그 국민 혈세를 이렇게 개인이 호화 생활하는 자금으로 마구 써버렸다.
정말 믿을 놈 없다. 황인숙 시인이었나. ‘나를 믿지 마세요’라는 시에서 ‘믿지 말라고.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는 사람을’이라고 꼬집은 게. 사랑의 배신을 말함이겠으나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믿음, 신뢰, 관계를 파괴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그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세상을 위해 순교할 수는 있어도 냄새나는 한 인간과 같은 방 안에서 공존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한 말을 이해할만 하다.
각종 혐오범죄와 모럴 해저드로 세상은 난세다. 이런 세상을 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영화에나 나올 무슨 ‘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현실에서 해결사 영웅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니 그게 더 안타깝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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