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밤을 수채화 물감과 함께 지샜다. 간단하게 생각했던 책 표지 작업은 같은 주제로 열 장 이상의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모든 화가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작업 결과에 대해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영감에 의한 표현에 비해 특정한 범위 안에서 한된 표현을 해야만 하는 작업은 오히려 작품 표현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가운데 화가의 오감이 듬뿍 배인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나는 유화 작업을 할 때와는 달리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수채화 작업을 즐긴다. 조금은 완성도가 부족하고 어설퍼 보일지라도 가능하면 처음 그대로의 마음이 배어있는 수채화가 좋다.
새로 발간할 수필집에 텍사스를 상징하는 꽃 블루보넷Bluebonnet을 책 표지로 넣고 싶다는 박인애 작가의 부탁으로 시작한 수채화 작업은 내 마음 한 가득 보라색 바람을 몰고 왔다. 표지 그림의 완성도를 떠나 아트지 위에 번지는 보라색 물감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작 형태를 보여주어야 하는 블루보넷보다는, 하늘 표현에 나의 모든 신경이 가 있었다. 신의 창조에 저절로 숙연하게 하는 텍사스의 하늘은 누구에게나 시각적 행복함을 선물해 준다.
청초한 남보라색 Dioxazine Purple 블루보넷은 봄 하늘까지 보라색으로 물들인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번성하는 그 꽃은 사월의 텍사스를 아름답게 장식해 준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의해 “위대한 영혼” 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블루보넷은 군집 되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사람도 함께 하는 가운데 기쁨이 더 커지는 듯 말이다.
박 작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큰 기쁨이 된다. 작가의 삶은 물기 부족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대지 위에 피어나는 블루보넷 같다. 그녀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삶은 오늘날의 박 작가를 있게 한 기반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솔직하고 담백한 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옆집 언니 같고, 누나 같은 친근함으로 독자의 마음에 다가온다.
열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수강생이나 지인에게 도전을 주고 꿈을 꾸게 하는 사람, 박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 한 견에 숨겨 두었던 어두운 이야기까지도 쏟아내게 되고 그녀의 깊은 마음이 담긴 사랑으로 위로 받게 된다.
“시인이란 이름으로 태어나 시인이란 이름으로 남고 싶다” 는 작가의 철학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난 해 연말 첫 시집을 출간하더니, 어느새 두번째 수필집을 발간한다. 2년 동안 무려 3권의 책을 출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열정과 부지런함에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회화나 문학을 막론하고 작가들은 작품을 시작하기 전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면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 노력과 방법은 작가들마다 또는 분야에 따라 독특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며, 더러는 작품제작을 위해 일탈하는 작가들도 있다.
박 작가는 책을 많이 읽는 분으로 익히 알고 있지만 장소에 상관없이 뭔가를 종이에 적거나 랩탑에 글을 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한 편의 시를 적기 위해 한달 동안 엉겅퀴 밭으로 사진기를 들고 출근할 만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내겐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나 역시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기에 그녀의 작품에 대한 노고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은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 보다 마음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림이 화가의 마음을 비추는 것이라면, 글 역시 그럴 것이다.
오늘도 여김없이 해지는 서편 하늘 끝에 자리하고 있는 바다를 본다. 퇴근길에 만나는 하늘 바다, 오늘은 오렌지 빛의 석양 바다 위를 떠다니는 보라색 돛단배가 보이는 듯 하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 돛단배를 따라 하늘 속 바다 위를 달려 본다. 하루의 고단함이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녹는다. 텍사스의 하늘은 언제나 창조주의 위대함을 가르쳐주고 내 작업에 새로운 비전을 갖게 해 준다.
해가 기울수록 사라지는 오렌지 빛, 어느새 하늘 바다는 핑크를 머금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고 이내 진한 어둠으로 ‘오늘’이라는 걸작의 막을 내린다. 코끝에 머문 보라색 바람은, 나의 시린 가슴 하나 가득 보라색 물감을 풀게 하고 긴 미술 이야기로 화실 한 켠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박 작가를 위한 수채화 표지 작업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좋아하는 스승을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 그녀에게 기쁨으로 남겨지길 소망하며 다시금 붓을 들어 본다.
작은 보라색 바람이 스케치북 위에 머문다.
문 정
MFA. Academy of Art University San Francisco
The 8th university (Universite, Paris-VIII)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조선대학교 미술 대학원
국립 목포대학교, 광주 교육대학교, 국민 대학교 강사 엮임
개인전 3회 및 국내외 그룹전 및 공모전 다수
현) 드림아트 미술학원 원장, H Mart 문화센터 원장
Tel. 469-688-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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