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고 돈 쓰려고 왔다. 쓸 돈을 벌기 위해 지구촌 여기 저기 다니다 보니 시차 때문에 함 밤중에 깨는 경우가 많다. 새벽 3시. 책을 집어 들었다. 다 읽어도 잠이 올 기미가 안 보인다.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는 이영광이라는 시인의 첫 번째 엣세이집의 제목입니다. 솔직히 잘 모르는 작가였는데 제목만 보고도 느껴지는 내공이 대단타 싶어 찾아보니 시인이라고 합니다. 아, 어쩐지...그런데 그 분의 시나 엣세이를 한편도 읽어 보지 못해 마음은 이미 저만치 책방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도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고 맞장구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문장에 자유로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입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때문에 매년 이사를 하다시피 하던 우리 가족은 광주 시내에 고래등 같은 할머니의 기와집을(아홉살 꼬마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 두고도 셋집을 전전 해야 했습니다. 봄이면 뜨락에 머위잎이 나풀거리고 벛꽃이 흩날리던 대문이 아주 큰 집이었습니다. 대청마루엔 앞 뒤로 문을 여 닫을 수 있는 문이 있어 여름에 문을 열어 놓으면 황소 바람이 드나들며 마당에 핀 꽃잎들이 들락거리며 광속에서 꽃 냄새가 진동하던 황홀하게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학교 운동장만한 대청 마루 광 속엔(전라도에선 창고를 "광' 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소 한마리도 넉넉히 들어갈 큰 항아리들이 여럿 즐비했었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선 말린 북어며 보리굴비며 곶감이며 깨강정이며 호박엿등이 요술항아리 처럼 쏟아져 나오던 그런 자랑스런 집이었습니다. 그런 집에 살던 손녀 딸이라는 것을 알리가 없는 주인집 아들녀석은 날마다 나를 괴롭히는데 그 행동거지가 어찌나 조악스러운지 아홉 살난 최신식 어린이, 어금니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켜야 했었습니다. 오십여년이 흘렀건만 주인 집 아들이었던 그 녀석 이름이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정. 회.진.
그녀석은 자기가 살던 안채를 지나야 우물에도 갈 수있고 화장실도 갈 수 있는 집 구조를 이용해 떡 하니 마당에 줄을 그어놓고 "너가 사는 방 앞만 네 땅이고 여긴 내 땅이야, 여기 지나가려면 돈을 내!" 하면서 괴롭혔습니다. 그 시절 그나마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뒤뜰 아지트 감나무밑에 노을빛에 기대어 앉아 활자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책을 보는 것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주인 아들 녀석은 그 꼴을 보지 못하고 매번 괴롭혔습니다. 펄벅의 대지를 읽고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읽던 나름가슴 뜨거운 여자였던(?)조숙한 아홉 살 소녀였는데 말입니다. 책을 빼앗아 담너머로 던져 버리곤 "내 감나무야, 여기 앉지마" 하며 심통을 부리던 전형적인 '갑'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어느 날 나한테만 부리던 꼴통짓을 내 금쪽 같은 동생들에게 하지 않겠습니까? 텔레비젼을 시청하기 위해 주인 집 마루에 주르르 앉아 있던 동생들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쫒아 내겠다며 구슬을 내 놓으라며 보너스로 꿀밤까지 때리고 있었던 것 입니다. "흐미~나가 나 괴롭히는 것은 참아도 내 동생 괴롭히는 꼴은 못 본다. 너 딱 걸렸스~" 그날 이후로 그녀석은 개 구멍을 통해 바깥 출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셋방 사는 우리 방 앞을 지나야 대문이 있는데 "야, 우리 방 앞 땅은 내 땅이야" 하고 딱 금을 그어놓고 악바리처럼 막대기까지 들고 지켜서서 못 지나가게 했으니 말입니다. 그 녀석 개구멍을 지나 바깥 출입을 하면서도 희죽거리며 즐거워하는 바람에 분이 풀리지 않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니 '나를 좋아했었나?의문이 듭니다만 물건너간 옛이야기 입니다.
어쨌든 땅과의 전쟁을 일찌감치 치른 나는 펄벅 대지의 왕룽처럼 내 땅에 대한 애착이 성실과 근면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내 마음데로 골라 갈 수 있는 화장실이 다섯개나 되는 어엿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ㅎㅎ가끔 화장실을 갈 때면 그 때의 '땅금'이 생각나 일찌감치 재화에 눈을 뜨게 해준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그녀석이 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역쉬~ 이론 보다는 현장교육이 최고란 생각이 듭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다고 더더욱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에게 돈을 꾸어 본적이 없었던 사람이거나 나 처럼 금 그어 놓은 곳을 통과 해야만 갈 수 있는 화장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가난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오늘도 돈을 쓰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갑니다. 나도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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