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나팔 꽃:정호승)
나팔 꽃을 유독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오랜만의 휴가를 맞아 집에 온 작은 딸과 함께 뜰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어떤 것이 부추이고 어떤 것이 풀인지 분간을 못해 부추를 풀로 착각해 부추 한 두둑을 죄 뽑아버린 손녀딸에게 목하 연설중이십니다. 부추와 풀을 구별 못하는 녀석이 쑥갓과 쑥은 구별할까요? ㅎㅎ그 동안 일궈 놓으신 뜰안의 모든 것들을 한껏 상기된 얼굴로 알려 주시기에 바쁘십니다. "우와와, 이걸 할아버지가 다 심으셨어요?" "할아버지는 못 하시는게 뭐예요?" 깻잎을 따면서도 "우와 냄새가 넘 좋네요, 마트에서 산 깻잎과 비교가 안되게 향이 끝내 주는데요!" "야아~ 진짜 예술인데요" "으흐흠, 고추가 왜 이렇게 맛있어요? 씹는 맛이 아삭아삭 꼭 오이 같아요" 호박과 불루베리에 덕을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고선 "우와왕! 할아버지 짱!" 그런 손녀 딸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습이 금방 핀 나팔 꽃 같습니다.
손녀딸의 칭찬에 아버진 고기가 물을 만난듯 신나셨습니다. 상추,부추,고추는 기본이요. 당근, 오이, 피망, 비트, 열무, 배추, 갓, 양배추, 신선초, 깻잎, 파, 치커리, 허브, 케일, 머위, 아욱, 술란초, 미나리, 호박, 딸기, 토마토, 불루베리, 복숭아 , 사과, 배, 감, 무화가, 석류 등등 꽃 나무까지 합하면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먹는 재미보다는 기르는 재미가 더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료나 약을 일체 하지 않는 우리 집 채소와 과일은 크는 족족 주변의 달팽이님과 다람쥐님, 새님, 그리고 알 수 없는 벌레님과 곤충님들과 토끼님들에게 뺏기고 매년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는중입니다. 아, 고양이님도 한몫 하십니다. 입소문 때문인지 해마다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내일이면 먹겠다' 하고 점찍어 놓고 아침에 나가 보면 여지없이 어느님이 가져 가셨는지 익은 것만 골라 쏙쏙 따가고 맙니다. 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충님께서 먼저 잡수시고 조금씩 남겨둔 비트로 장아찌도 만들고 갓김치, 부추김치, 파 김치등을 담아 주변 이웃들과 나눠먹는 재미가 쏠쏠하긴 합니다만 구순이 가까운 연세에 이 모든 것을 하시기엔 너무 과하다 싶어 자꾸만 그만 하시라 말립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존재감을 확인하는 작업들이니 말리지 말아라" 라구요.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일을 하시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넘 가벼워져 침대에 누워 계셔도 흔적도 없는 아버지가 구부러진 허리로 기어다니시피 일을 하고 계실 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일을 끝낸 후 마당의 각종 야채를 따서 샐러드를 만들고 손녀딸이 풀이라고 쥐 뜯어 놓은 부추로 부침개를 만들어 햇볕 좋은 식탁에 앉았습니다. 작년에 따서 담궈둔 야생 포도주도 빠트릴수 없지요. 술을 못마시는 사위와 달리 술 한잔 정도는 즐길 줄 아는 손녀와 와인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께서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노래가락이 흘러 나왔습니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속에 슬퍼어 지이더라아~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 날은 가아안다(봄 날은 간다 3절 가사 입니다)
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시더니 급기야는 노래를 잇지 못하시고 자리를 뜨고 마셨습니다. 노래를 듣는 내내 목구멍에 무엇이 걸린 것 처럼 목이 아파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난, 아버지가 자리를 뜨시자 마자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를 딸아이가 안고 등을 토닥 거려 줍니다. '내년 봄도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버지도 나도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나 죽거던 화장해서 내가 매일 다니던 산책길에 뿌려 주라" 던 말씀이 떠올라 서러웠습니다. 오늘 아버지와 함께한 이 봄을 처음 본 것 처럼, 마지막인 것 처럼 기억속에 새겨 놓고 싶은 날 입니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