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깜짝할 사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단 몇초만에 내 앞을 휩쓸고간 강풍이었다. 나는 장승처럼 꼼짝달싹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몇년전 집 앞에 서있다 태풍을 맞았던 경험이다. 토네이도나 태풍을 맞닥뜨리면 도망가고 말 새도 없다는 걸 그 때 알았다. 놀라서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주변은 초토화됐다.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감을 느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순간 쪼그라드는 내 모습, 워낙 센 힘을 목도할 때의 묘한 희열과 경탄마저 나왔다.
지난 성탄 휴일 기간에 북텍사스 지역에도 토네이도가 덮쳐 사상자를 냈다. 가옥을 무너뜨린 건 한두채가 아니다. 수천채였다. 쑥대밭을 연상케하는 피해 현장을 보면서 전율한다. 이게 대자연의 위력이구나. 겸허해진다. 한인 피해 가구도 있었지만 크지는 않아 다행이다. 돕기 위해 방문한 한인들도 무너진 집들과 건물들을 보면서 자연 앞에 인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를 느꼈다고 말한다.
자연재해 앞에서는 미국도 별 수 없다는 걸 이민 한인들도 금방 알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지진이, 중남부에서는 토네이도가 심심찮게 찾아온다. 자신의 존재감을 잊지말라고 깨우치려는 듯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이 재해란 이름으로 불쑥 찾아온다. 이민자의 삶 자체에도 예상치 않던 재해들이 불쑥 찾아와 시달리고 있음을 반영이라도 하듯 말이다. 건강이거나, 관계에서나, 사업에서나 교통사고처럼 예고없는 방문에 놀라는 우리들의 자연재해.
자연재해는 운명이라쳐도 최소한 인재(人災)는 막아야 한다. 새해부터 텍사스도 총을 차고 돌아다니게 됐다. 물론 장소 규제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부 시대처럼 총을 찬 사람을 시장에서든, 거리든, 놀이터에서든 볼 수 있게 된다. 자신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총기 휴대 선택권을 준 것이다.
의도는 참 좋다. 미쳐서 총으로 설쳐대는 범행자들에게 총으로 당당하게 방어하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문제는 한인들에게도 총을 마구 쥐어주면 괜찮냐는 말이 나돈다. 그런 우려는 ‘분노’와 연결된다. 한인 남성들은 화가 나면 제어 못한다는 선입견 1호 대상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부끄러운 일이다. 가정불화나 말다툼을 혹시나 총으로 끝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목소리다. 같은 한인 남성으로서 다짐한다. 삶에서 인재를 만들진 말자고. 분노를 억누르자고. 삶이, 세상이 날 배신한다고 느껴져도 그건 순전히 내 오해일 거라고, 무조건 내 잘못일 거라고.
새해 잔나비 해라서 그런지 원숭이 일화가 많다. 불교적으로 잔나비 이야기가 와닿는 게 있다. 인도네시아 원주민이 원숭이를 손쉽게 잡는 이야기다. 그냥은 절대 잡기가 어려운 원숭이라 해도 쉽게 잡는 방법이 있다. 흙더미를 만들어놓고 작은 구멍을 낸 뒤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어놓는 방법이다. 구멍 속에 손을 넣어 음식을 움켜쥔 원숭이는 구멍이 작아 손을 빼지 못해도 끝까지 주먹을 펴지 않는다. 움켜쥔 음식을 포기하지 못해서다. 잡히면 식용이든 놀이갯감이든 전락하는데도 그 음식을 놓지 못하다 결국 잡힌다.
우리보고 하는 소리다. 내려 놓아야 보인다는데,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데, 포기해야 새로운 게 주어진다는데도 우린 못 버리고 못 놓는다. 괄모귀배(刮毛龜背) 인생이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애쓴 일들이라는 게 거북이 등을 긁어 털을 얻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단단한 그 딱지에서 무슨 털을 얻어내겠는가. 그런데도 욕심에 눈먼 채, 삶의 방향을 잃은 채 부질없는 노력만 했던 것일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누(累)가 없는 것이다”고 말한 성현의 말과도 연결된다. ‘누’란 자신을 얽매고 옥죄는 일이기도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해서는 안될 일을 넘보다가, 가서는 안되는 길을 서성대다가 남는 건 누요, 거북이 등딱지 티끌 뿐이다. 따뜻한 털을 얻기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헛수고일 뿐이다.
예이츠의 말처럼 모든 생명은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제 자리를 찾고 또 진화한다. 지나온 삶과 죽음에 대해 반성해야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
잠잠하다가도 한차례 예고없이 달겨드는 삶의 토네이도야 맞대응하긴 어렵다치자. 하지만 시시때때로 내 안에서 용솟음치는 못난 소용돌이만큼은 이제 내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원숭이를 잡듯이 내 불안한 폭풍에 덫을 놓는다. 더 이상 어지럽지 않게 자유하기 위한 새해를 바라면서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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