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대통령이 같은 날짜에 각각 대국민 담화와 국정연설을 했다. 우연찮게 두 대통령 모두 임기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과의 만남을 마련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실망도 컸다. 두 대통령 모두 북한 핵에 대한 후련한 대처 방안은 쏙 뺀 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핵우산 제공에 의지하겠다는 기존 방침에서 한 치도 나가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북’자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어떤 국가도 미국과 미국 동맹국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말라고 엄포만 놨다. 전략적 인내라는 입장인 모양인데, 사실은 전략적 무관심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 사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들로서 큰 문제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긴 어렵다. 괜히 역풍을 맞아 그나마 이뤄놓은 치적마저 깎아먹을까 조심스러울 것이다.
더우기 북한 핵에 대해 지금껏 아무도 제대로 잡돌이 하지 못한 상황에서 본인이 꼭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잘못되면 모든 걸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데서 새삼 용기 내기는 쉽지 않을 터다.
다 아는 것처럼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면 주한미군을 방문한다. 자국 군인에 대한 격려 차원이겠지만 지휘관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즉,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는 주문이다. 한국 국민을 향한 연설에서는 북한을 응징하겠다, 단호하게 대처하겠다 말하지만 속내는 제발 북한이든, 남한이든 문제 일으키지 말고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것.
이 모양새를 보니 그 유명한 ‘회의는 난무한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유럽 연합국이 서로 공을 나누기 위해 빈에서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회의는 엄청나게 하는데 내용면에서 전혀 진척이 없자 참석한 오스트리아의 노장군이 남긴 말이다. 두 대통령 국정연설과 국민담화를 보다 보니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연설은 난무한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고.
물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렵다는 생각은 든다. 잘 해야 본전일 것 같은 자리다. 아무리 잘하다가도 하나만 잘못 해도 전부 잘못한 것처럼 취급받는 자리, 짐이 무거운 자리임에 분명하다. 한국 대통령도 연설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연신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안쓰럽다. 대통령의 한숨이 어찌 그 한 개인의 한숨이겠는가. 나라와 국민의 한숨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모든 리더가 그렇듯 대통령 자리도 혼자서 다 하려면 이런 문제가 더 커진다. 일은 난무하는데 진전은 없게 된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인물을 통해 책임있는 진척이 이뤄져야 한다. 통솔력과 인력관리, 상하소통 및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그 유명한 제갈량도 아랫 사람들 장부를 일일이 직접 조사하는 친교(親校)를 했다. 그러자 누군가 충고했다. “통치에는 체통이 있다. 상하가 영역을 침범하면 안된다. 주인 혼자 다 하려 들면 심신이 피곤해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며 불필친교(不必親校)를 권했다. 제갈량은 알아듣고 사과했다. 모든 일을 직접 다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지도자에겐 일만 난무하고 진전은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히틀러 휘하 최고 군인이었던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은 후에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자살했다. 그런데도 “그는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모든 병사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투에서 승리는 말할 것 없었다. 적국의 처칠마저도 “전쟁의 참상과는 별개로 장군들을 평가한다면 나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신경쓴 건 군사, 즉 부하들의 사기였다. 아무리 수만대의 뛰어난 무기가 있고 전술이 있다해도 전쟁에서는 군사의 사기가 저하되면 패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어루만지는데 공을 들였다. 본인을 바라볼 때 사기가 꺾이는 일이 없도록 몸과 마음을 다듬었다. “기사란 갑옷과 칼은 피로 물들여도 정신은 정결하고 맑게 유지해야 한다”는 명언도 남겼다. 또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얼마간 돈을 부치니 사용하되, 내 이름을 팔아 남기려 하지 말고 꼭 정확하게 환전해서 쓰라”고 당부하는 청렴성을 보이기까지 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이유는 장군을 보는 군사들의 사기가 넘쳐나서다. 우린 지금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를 바라볼 때 사기가 우러나고 있는가. 연설과 말만 난무해 보이는가. 혹 따르는 자로서 한숨만 난무하는 건 아닌가. 왠지 심호흡을 크게 해야할 듯 하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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