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와 포퓰리즘, 주류의 사명감에 초라해지다<이준열 편집국장>

지금은 그녀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한 때는 민주당 후보였는데도 그렇다. 웬디 데이비스 텍사스 상원의원이다. 2014년 텍사스 주지사 민주당 후보였을 때 그녀는 정치가로서 절정이었다. 
화려했던 이유가 있었다. 후보 출마 1년전 쯤에 텍사스 주 상원에서 낙태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홀로 11시간의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인 필리버스터 연설로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됐다. 금발의 미모를 갖춘 그녀가 이혼 후 딸 둘을 키우며 시급을 받고 일하면서도 하버드대에 진학해 공부를 마쳤다는 것도 알려져 ‘제2의 힐러리’라는 타이틀까지 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그렉 애보트에게 졌다. 그녀에게 인기를 준 그녀 스토리가 거짓말이라는 게 탄로나 결정타를 맞았던 것. 지금 그녀는 선거판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웬디 데이비스를 정치판의 스타로 부상시켜준 필리버스터가 한국에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테러방지법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에서 벌이고 있는 필리버스터에서 또 다른 한국 여성 의원이 8시간 넘게 시간을 채웠다 해서 이슈가 된 것이다. 
한국에선 무제한 토론으로 불리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안을 막는 게 마치 기네스북 도전이라도 하듯 해서 이에 찬반 여론도 분분하다. 해당 법안이 국민의 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라는데 꼭 이렇게까지 반대를 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고, 테러방지법이 국정원에 의해 개인사찰에 악용될 수 있으니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 의회의 꽃이 될 수 있었다. 다수의 횡포를 막는 마지노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약자와 소수자가 강자의 횡포에 대항하는데 몸이든, 시간이든, 쓸 수 있는 걸 다 써보라는 의도다. 실제 필리버스터라는 말 자체가 스페인어의 ‘해적’ ‘약탈자’라는 단어에서 왔다니 그 의도가 잘 전달된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남의 권리를 약탈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즉, 잘 써야지 악용, 오용하면 그 피해는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필리버스터가 포퓰리즘과 맞물리면 파급력은 크겠지만 그 후유증도 우려해봐야 한다. 인기를 얻어 정치를 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국가 파탄 지경에까지 이른 베네수엘라 역시 이전 대통령 차베스의 포퓰리즘에 좌지우지된 케이스다. 극단적 사회주의자로서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당시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가 주택, 필수품 무료 등 모든 것을 공짜로 나눠주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어쩌면 신 사회주의 국가로 환골탈태해보겠다는 좋은 의도였겠지만 결국 나라는 국고가 거덜나 이제 파산에 직면했다.
한창 진행 중인 미국 대선 경선에서도 포퓰리즘은 이제 경계 대상이다. 그래서일까. 이전에 인기라면 누구 못지 않던 힐러리의 예상외 부진이. 기존 인기와 맞닿은 ‘거물급 정치인’이란 이미지에만 의존하려는 안일한 선거 전략이 문제다. 새로움도, 감동도 헐겁다. 특히 이제 그녀 자체가 기득권에 속한 진부한 정치인으로 보일 정도니, 이를 잘 극복해야 할 판이다.
이 점은 정치 이력이 전무한 기업가 출신 트럼프의 약진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공화당 대선 주자 선두는 물론 대세로 떠오른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간 미국 주류인들이 많이 억눌려있었던 것 같다고. 자신들이 주류인데 주류 행세도, 목소리도 내지 못한 억하심정을 트럼프를 통해 대변하는 것이라고. 마이너리티가 지배하는 미국에 대해 염증이 나 이제 다시 되찾겠다는 표현이라고. 
“주류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과 동조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피지배자로 남길 원하거나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다”고 정의내린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이 사실이라면 트럼프의 선전이 이해가 간다. 그런 들뢰즈도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혜택과 기득권을 가지고 스스로 주류라고 착각하지 말며, 한시라도 그 작은 권력을 통해 남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1948년 대선 때 모두 질 것으로 예상했던 트루먼은 승리했다. 학력도 고졸인데다 연설도 투박한 그였지만 끝까지 도전자 정신으로 유권자들을 움직였다. 그런 그가 한 말, “나는 신이 우리 미국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줬다고 믿는다”는 포퓰리즘의 찰나적 인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사명감이었고, 애국심이었다. 영도자로서의 미래성이었다. 그게 바로 주류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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