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과 사람 챙기기, YS를 잊기 전 남기는 조사(弔辭)- 이준열 편집국장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두 가지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 운명을 달리 해도 그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아직 죽은 게 아니라 그들만의 시간 속에 살아있다고 믿는다는 것. 그러다 망자(亡者)에 대한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 그 때 비로소 죽은 자는 침묵의 또 다른 시간 개념으로 영원히 사라진다고 여긴다는 것. 
최근 운명을 달리한 한국의 전 대통령의 장례를 보면서 생각난 이야기다. 망자가 된 그분에 대한 평가와 기억, 경험담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아직은 ‘살아있는 셈’인가. 민주화 투사니 금융실명제니 좋은 평가도 있지만 역사의식 부재, 3당합당의 배신 등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게해 또 다른 한국 대통령이 된 고 노무현 대통령도 생전에 YS에 대해 좋은 말만 하지 않았다. 보스이지만 존경하기는 어려운 지도자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YS 하면 나는 도망갈 수 없는 과거가 있다. 1987년 대선에서 DJ가 아닌 그에게 표를 던졌다는 사실. 물론 당시 둘 다 낙선했다. 전라도 출신인 나는 YS 찍었단 말을 고향의 가족에게 무심코 했다가 친족들에게 몰매 맞을뻔 했다. 거듭 솔직히 고백하건대 YS가 좋아서 찍은 게 아니다. 양 김이 찢어지는 걸 보고 자포자기식으로 아무나 찍은 게 YS였다. DJ에게 좀 더 실망감이 컸을 수 있었다. YS가 대학 선배니까 찍은 것 아니냐는 오해와 욕도 오래 받긴 했다. 
YS에 대한 개인적 추억은 없는 것이나 같다. 대학교 시절 친구 따라 간 교회에서 장로라며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를 하는 걸 들은 적은 있다. 주로 정치와 나라에 대한 내용이었고, 정적에 대한 독설이 담긴 기도여서 많이 놀라고 실망한 정도다. 퇴임한 지 오래된 시점에 달라스를 방문했을 당시 기자 회견장에서 같이 밥을 먹은 게 가장 가까이서 본 기억이다. 당시 버릇없는 모 기자에게 따끔하게 지적하는 걸 보고 여전하다고 느꼈던 기억은 있다. 
YS에 대한 일화에서 가장 유명한 건 ‘닭 모가지와 새벽’이다. 비틀어도 올 건 온다는 것이다. 그게 문민정부든, 자유화든, 아니면 대통령 자리든. 비슷한 말이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온다.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저항하느라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위고는 ‘웃는 남자’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체험적 통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주인공은 귀족인데 반대파에 의해 귀까지 찢어지는 형벌을 받아 항상 웃는 얼굴이 된 인물. 웃는 얼굴이 된 김에 배고프고 억압 당하는 백성을 위해 익살광대가 된 그는 탐욕과 계급으로 배불린 상류층 귀족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갖는다. “당신들은 권세 있고 부유하다. 또 어둠을 이용해 이득을 취한다. 그러나 조심하라. 또 다른 거대한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명이다. 여명은 정복될 수 없다. 그리고 곧 도래할 것이다.”
YS의 장점으로 ‘자기 사람 잘 챙긴다’가 거론된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도 잘하고 또 일단 되면 지극히 챙겼다고 말하는 후배들이 많을 걸 보면 사실인 듯 하다. 그 점에서 기억되는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사실 세종은 태종의 장자도 아닌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았고 왕위 찬탈 과정에서 처가 일족이 몰살 당하는 일도 겪었다. 그러나 세종은 본인의 치리 동안에 자기 신복을 죽인 적이 없다. 또한 황희 정승도 원래 세종을 반대하는 인물인데도 그를 발탁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능력만 보고 품은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지도자인가. YS가 절대 그 정도는 아닌 걸 잘 안다. 다만 또 다른 세종이 나왔으면 해서다.
YS에 대한 실망은 DJ에 대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에 관련해서는 쥘 미슐레라는 프랑스 역사가가 했다는 말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면서 자기 모습을 지켜나가는 게 어려운 것이다”는 말로 달래본다. 
그럼 YS는 한국 정치사에 기여한 바가 없단 말인가. 니카라과의 혁명 정권이었던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이야기로 대신한다. 11년 집권 후 대선에 패배한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해 ‘실패한 정권이냐’는 질문이 쇄도했다. 혁명 정권에서 장관직을 수행했던 시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니카라과 민중이 산디니스타 정권을 통해 하늘을 봤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잠깐 동안 본 하늘은 그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을 것이고 이것은 후에 다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고. 
YS 정권 뒤에 한국에서도 그랬던 것 아닐까. 아니면 내 목을 비틀든지. YS를 영원히 잊기 전에 이렇게 몇가지로 기억해보며 잠시 애도한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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