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린 l 달라스의 전원일기

오랜 여행 끝에 집에 돌아와보니 그새 뜨락에 늦가을이 깊이 들앉아 있었습니다. 자연의 덧없는 변화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리듬감이 금세 느껴졌습니다. 손을 타지 않아서 되려 자연스럽고 한껏 멋스러워져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집을 비우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풍경이었을 겁니다. 솎아내고 자르고 뽑고 어떻게든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손길을 받아 단정은 하겠지만 이토록 자연스러운 신의 연출에 감동할 수는 없었겠지요. 뻗고 싶은 대로 뻗고 자리하고 싶은 대로 자리하고 매달리고 싶은 만큼 매달리고 꽃과 열매와 잡초와 나뭇가지와 낙엽이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잘도 어우러져 한편의 완성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눈만 뜨면 내내 늘 보던 것들인데도 뜨락의 식구들이 조금은 낯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생기롭고 화려했던 꽃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저마다 각각의 씨앗과 열매 맺기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물기 없이 마른 몸으로 씨앗들을 잔뜩 매달고 서걱거리는 꽃대들을 보자니 안쓰럽고도 참으로 대견했습니다. 꽃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잉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 그득한 아름다움이 엿보였습니다. 타닥타닥 콩들은 저절로 벌어져 이리저리 튕겨나가기도 했고 야물딱지게 여물기도 했습니다. 오렌지는 집을 비운 사이 새들이 먹어버릴까봐 서둘러 따버리고 몇개만 겨우 남겨두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찬 바람과 서리를 맞으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탐스럽고 때깔 곱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이쿠! 기다려 줘야 했는데… 성급한 판단으로 다 크기도 전에 손을 대다니 그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새들에게 안 빼앗기려는 이기적이고 못난 인간의 탐욕에 오렌지는 곱게 향기로운 한 방을 먹였습니다. 매달린 채로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는 어찌나 선명하고 예쁘던지 선뜻 따기가 미안할 정도여서 조금 더 두고 바라만 보기로 했습니다. 그악스럽게 싸그리 먹어버리는 포만감 보다 더러는 은은하게 바라보는 충만함 충일한 기쁨이 더 크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간 미루어왔던 뜨락의 고구마줄기를 거두었습니다. 그간 날씨가 푸근하다보니 넘실거리는 그 푸른잎이 좋아 오늘 낼 오늘 낼... 하면서 미루고 있었더랬습니다. 하지만 밤새 내린 찬 서리에 마치 뜨거운 물에 데쳐놓은 것처럼 그 푸른 잎들이 제 빛을 잃고 풀이 팍 죽어버렸습니다. 너무 안쓰러워 더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드디어 미용작업 들어갔습니다. 이것들이 남들에겐 그저 고구마일 뿐이지만 제게 있어서 만큼은 지난 여름, 날 성장시켜 준 고맙고 의미있는 '고구마님'되시겠습니다. 왜냐구요? 저것들을 가꾸고 돌보면서 제가 마음을 기울인 만큼 꼭 그 만큼 자라는 걸 보면서 저도 녀석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은 깨달음마저 줬으니 이쯤되면 이것들을 고구마 선생님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더러는 크고 더러는 작고 또 생각지도 않게 애기 엉덩짝만한 고구마를 몇 개 얻기도 했습니다. 너무 오달져서 인증샷을 하고 멀리서 직장 다니는 딸아이와 적적하실 아버지께도 빅뉴스라고 사진 전송하는 유난을 떨었습니다. 이런 게 대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 한 몸 불살라 자신을 거두는 손길에게 이.렇.게 함박웃음을 안겨주다니! '고'선생께선 끝까지 제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작은 일에 기뻐하라고! 내가 받은 은혜만큼 돌려주라고! 감사하라고! 하하. 고구마 하나갖고 제가 너무 멀리 갔나요? 그런데 이렇게 달달한 가르침을 주신 고구마님을 막상 쪄보니 참으로 싱거웠습니다. 고구마를 지인들과 나누고 싶었는데 맛이 없어도 너무 없지뭡니까? 당근 맛보다 무우 맛보다도 더 밍밍했습니다. '고선생'은 계속 반전을 가르치십니다. 뭐든 의미를 붙이기 좋아하는 저는 덤덤하게 담담하게 유난떨지 말고 한 해 마무리 잘하라는 뜻으로 또 받아들였습니다. 마무리의 눈길로 찬찬히 뜨락을 둘러보니 씨앗으로 한 해를 맺음하는 갓이며 깻잎이며 부추 열무 케일 상추 등속들… ‘고맙다’는 소리가 절로 납니다. 뭇생명들에게서 ‘생명의 연대 의식’을 느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온갖 벌레와 지렁이와 달팽이와 다람쥐와 새들과 토끼들과 한 해 농사를 같이 짓고 같이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제 손으로 애써 지은 것들을 자신이 먹는 것보담 저들에게 먹히는 게 더 많아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에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자신의 생에 충실했을 뿐일 겁니다. 성실한 생 앞에 그저 고마워해야 하는 게 답이지요. 여러분께도 이 가을의 축복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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