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봉의 한국 문화 산책: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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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하기야 벌써 11월도 하순이니 따뜻한 날씨를 기대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할 것이다.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하나 둘씩 옷을 벗고 앙상한 모습을 드러낼 쯤이면 늘 떠오르는 단어와 그림이 있다. 보기만 해도 찬바람이 피부에 스며드는 듯한 그림, 추사(완당)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글귀가 이 ‘세한도’에 씌어 있다는 것을 국어 시간에 배우고 난 뒤, 그림은 본 적도 없지만 그 글귀가 좋아 ‘세한도’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어느 날 한 친구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에서 ‘세한도’라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그림이 주는 썰렁한 느낌과 너무 성의 없이 그린 그림이라는 첫인상 때문에 적잖이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글귀도 논어의 자한편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세한도와 그 글귀는 별개의 것으로 나의 뇌리에 저장되었다. 
한국에 살 때에는 기회만 되면 아내를 따라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돌아보곤 했다. 결혼 후 붓을 놓고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지만 대학 시절 이미 국전에 입선했던 장모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내는 그림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고 그림을 보는 식견도 상당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림에는 전혀 문외한인데다 별로 관심도 없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인지 호기심은 있어서 종종 아내를 따라 나서곤 했었다. 그림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던 내가 아내의 설명과 조언을 들으면서 그림이 가지는 매력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때의 국전 나들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소박한 집 한 채와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세한도’도 처음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그림이었지만 추사의 생애를 공부하고 그의 사상과 학문을 조금씩 접하면서 ‘세한도’라는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고, 반복해서 볼수록 그 그림이 주는 무게와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세한도’는 완당의 나이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에서 힘든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보내준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에게 그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1844년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한 친구가 베푼 만찬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상적이 완당의 ‘세한도’를 펴놓고 모인 사람들에게 내보이니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다투어 제(題)와 찬(贊)을 혹은 시로, 혹은 문으로 붙였는데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 있는 소위 〈청유 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로 이로 인해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완당의 세한도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 걸작으로 이 작품을 보고 감상평을 남기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생각될 정도로 신격화 되어 있다. 누구도 이 작품을 감히 평가하려고 들지도 않을뿐더러 그 명성에 눌려 자신의 솔직한 감상도 방해받고 만다. 이러한 어려움 중에도『완당평전』을 쓰면서 할 수 없이 소견을 밝힌다는 유홍준 교수의 설명을 인용하여 세한도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더해 보고자 한다.
이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실경에 있지 않다. 실경 산수로 치자면 이 그림은 0점짜리 그림이다.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완당은 여기서 갈필(渴筆)과 건묵(乾墨)의 능숙한 구사로 문인화의 최고봉을 보여 주었던 원나라 황공망(黃公望)이나 예찬(倪瓚)류의 문인화를 따르고 있다. 
구도만을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다. 그러나 필치는 완당 특유의 예서 쓰는 법으로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음이 이 그림의 매력이다.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력 따위를 따지는 화법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까지 보아야 제 맛과 제 멋과 제 가치를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세한도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이라는 낙관이 그림의 구도와 무게에 안정감을 주면서 그림의 격을 끌어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완당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반듯한 이 해서체는 글씨의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그리고 이 세한도에 더욱 감동케 되는 것은 그러한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완당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완당의 예술 세계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음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세한도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어 있는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갈필과 건묵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을 간취한 세련된 감상안을 갖춘 사람만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림과 글씨와 문장이 고매한 문인의 높은 격조를 드러내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완당은 자신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이 이 그림을 알아보고 그림을 그린 자신의 심경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세한연후……’라는 발문을 그림에 덧붙였을까? 진나라의 백아(伯牙)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이해해 주는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고 하는데, 세한도는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해 줄 사람을 기다려 일본인의 손에서 소실될 뻔한 위기를 면하고 오늘날 우리의 지고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이차봉
엘림에듀(Elim Education Center) 대표
관리형 홈스테이 기숙학사
elimedu@gmail.com|972-99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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