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화 ‘사도’에서 뒤주에 갇혀서 죽기 직전에 부왕인 영조와 나눈 사도 세자의 마지막 대화 내용입니다.
조선 21대 왕 영조는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성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 내내 서자로 태어난데다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으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던 영조는 세자가 태어난 후 그의 총명함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학문보다는 자유분방한 기질을 따라서 예술과 무예를 즐기는 세자는 결국 아버지인 영조의 눈밖에 나게 됩니다. 결국은 아버지의 손에 뒤주에 갇혀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학문에 정진하여 신하들이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학식이 뛰어난 왕이 되기를 바라던 부왕인 영조와 단지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이 그리웠던 세자인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둘이 나누는 대화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아들을 세자에서 폐하고 뒤주에 가둘 수밖에 없는 왕인 아버지, 사뭇 선을 넘는 기행을 일삼다 나중에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도를 넘는 행동으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세자인 아들, 아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의 악행을 고할 수 밖에 없었던 세자의 어머니 영빈, 세손인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
아들의 죽음 후 영조가 내린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세도 세자라는 회한의 시호가 이 비극사를 잘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영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회한이, 구성진 곡소리와 함께 퍼지면서 얼마 전 타계한 여성 화가 천경자의 굴곡진 삶이 떠올랐습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무남독녀 외딸에게서 태어난 천 화백을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천자문을 들으면서, 창을 배우며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그 후 의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물리치고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손녀 천 화백을 위해 반신불수의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모델이 되어준 할아버지를 그린 ‘조부’로 1942년 제 22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여 화단에 등단한 후에 1943년 연이어 제 23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외할머니를 그린 작품 ‘노부’로 입선하여 재능을 인정받습니다.
1944년 우연히 토쿄역에서 만난 첫 남편과 결혼하여 1946년부터 전남 여고에서 교편을 잡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으나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지 못해서 집을 나온 후 이혼을 하게 됩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폐결핵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여동생의 죽음에다 혼자 남매를 키우며 힘든 삶을 살던 천 화백은 삶의 고통 속에서 넘치는 유머와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신문 기자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와의 만남을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했던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또 낳았으나 아내가 있는 유부남에다 주변에 항상 여인들이 있던 그를 기다리는 삶에 지쳐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삶의 무게가 실린 소재로 35마리의 뱀이 우글거리는 ‘생태’ 라는 작품으로 1952년 부산에서 연 개인전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 후에 홍익대 교수, 홍익대 동양화과 관장을 역임하면서 그 당시로써는 드물게 해외 여행을 즐겼던 그녀는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에 타히티까지의 여행을 통해 이국적인 여인들이 작품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 후 화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위작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1991년에 당시 국립 현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 미인도가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화랑협회와 미술관측이 감정 결과가 진품이라고 나오자 ‘자신이 낳은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있느냐’며 절필을 선언하며 홀연 미국으로 떠납니다. 1995년 생애의 마지막 전시회가 될지도 모른다며 가진 15년 만의 개인전은 8만 명이 관람하는 대 성황을 이룹니다. 생사가 항시 묘연하게 표현 되었던 천 화백은 올 8월에 뉴욕에서 별세 후에 언론에 알려집니다.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놓고 본인이 위작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별세 후에 다시 나타났으나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1995년 쓴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에서 말합니다. ‘비가 오면 슬퍼지도록 감각이 약동한다. 살아오는 동안 죽도록 일만 해온 습성 때문인지 내 신경은 잠시도 무심 상태로 놓아주질 않고 쉬지도 놀지도 못하는 불행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그래 나는 오직 꿈만을 파먹고 살았다.지나온 길이 평탄하지가 않아 눈이나 비,꽃과 친할 수밖에 없었고,자연에서 얻어지는 고독한 행복감에 젖어 오직 작업하는 일만이 편한 길이었다.’
꿈을 파다 간 여인, 천경자 화백.
우리가 꿈꾸는 있는 삶, 우리가 꿈꾸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꿈꾸는 삶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까요?
300전에 비운의 삶을 마친 사도 세자의 삶에서나 얼마 전 타계한 천화백의 인생에서도 어찌 보면 아버지던지, 연인이던지, 사랑하는 이에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갈망이 더 그들의 삶을 굴곡지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의 목마름이 단지 그들만의 목마름이었을까요? 꿈과 바람, 꽃의 화가로 불리던 천경자 화백, 그 녀의 목마름이 바람을 타고 느껴집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계시는 노로한 아버지가 마음에 밟히는 하루입니다.
김주연·(현)샤인미술학원 원장
서울 예고 졸업|홍대 미대 BFA|DBU MLA
서강대학교 심리상담 연구소 P.E.T. 훈련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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