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잘 안 풀릴고 답답할 때 사는 방법 중에 술에 취하듯 책 한잔 걸치고 책에 취해 노는 것도 가장 멋지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책은 자기 소모적 물결에 저항하고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힘이 되어 주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며 한숨 돌려 일도 잘 풀어질 것 같다.
임꺽정을 읽으면서 내가 책에 취했다. 임꺽정에 대한 사연은 저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다. 이민 오기 전 서울대학교 부근 신림동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고시촌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숙집이 많았다. 제가 사는 옆집은 서울대 학생 하숙집이 담이 낮은 집이었고 학생들은 자주 담을 넘어와 책을 빌려 가고 커피를 마시러 왔다. 어느 날 미대 학생이 (운동권) 임꺽정을 구입했다고 자랑했다. 그때가 임꺽정이 금서가 돼 구입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저자 벽초 홍명희는 북한에서 내각 부수석까지 지내 그의 저서가 금서가 되기는 당연지사였다. 그 때 그 책을 하숙집 학생들이 돌려보고 나에게 오기 전 그 학생은 경찰에 잡혀가고 그 후 임꺽정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무참히 박살나고 이민와서 오래 잊고 살았다. 그 후 홍명희 손자 홍석중은 <황진이>란 작품으로 북한 작가로 최초로 남한에서 2004년 제19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소식과 더불어 임꺽정을 읽게 되었다.
벽초 홍명희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삼일운동 당시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등으로 여러차례 옥살이를 했다. 일본 유학당시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이 세 사람을 조선 3재(三才)라 불렀다. 1942년 민주독립당 대표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중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차 평양에 방문했다가 북에 남았다. 1968년에 사망했다.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10년간 걸쳐 연재된 임꺽정, 그후 1985년 초판 발행돼 분단 이후에 쓴 그의 작품이 분단으로 46년만에 남한에서 초판 발행됐으나 전두환 정권 당시 잠깐 판금이 되었다 1995년에 2판이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임꺽정은 봉건사회에 저항하는 백정으로 도적의 괴수가 되고 도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의로운 도적 7형제들이 펼치는 활약과 조선시대의 풍습, 피폐한 백성들의 삶 위에 군림하는 파렴치한 양반들 속에서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민초들이 도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다. 임꺽정을 이끌어가는 에너지는 접신(接神)한 것 같은 이야기의 신명이다. 읽는 사람 역시 흥이 나고 열이 올라 감성과 현존의 엉덩이가 같이 들썩거린다. 조선 중기 백성의 일상이 극세화처럼 그려지고 전설과 우리말의 토박이식 문장이 끊임없이 돌출하는 샘물 같고 그리고 웃겼다. 디지털 시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그들의 삶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깔린 발칙 호쾌하며 민초들의 거친 삶을 재미와 흥미로 엮어 책에 손을 놓을 수 없게 한다.
1<봉단편>, 2<피장편>, 3<양반편>은 임꺽정 중심으로 임꺽정이 도적패를 결성하기 전 연산조부터 명종 초까지의 정치적 배경과, 백정 출신의 장사 임꺽정의 특이한 가계, 봉단이(임꺽정의 아버지와는 사촌)가 이교리 양반과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과정, 그 설정과 구성이 등잔의 심지를 올리며 빠져 들어가는 흥미진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변이 가라앉아 이교리가 복직 후 부인 봉단이가 정경 부인이 되기까지 소설의 전개는 상상을 초월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디로 튈지 몰라 독자도 똥줄이 탄다. <피장편>에서 선견지명이 있는 갖바치 양주팔(봉단이 삼촌)을 중심으로 그 제자가 된 임꺽정의 성장과 어지러운 시대 지배층들의 탐관이 소상하게 그려진다. 임꺽정을 읽으며 조선시대의 국토가 보인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작가의 의도적인 구성에 따른 배치로 보인다. 임꺽정의 활약과 그 시대 부패한 현실을 폭넓게 그려보이는 민중사관을 느낄 수 있다. 임꺽정은 한 개인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과 시대적 풍속과 우리말에 대한 보고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4, 5, 6<의형제편>은 이봉학, 박유복이, 길막봉, 천왕둥이, 배돌석, 서림 등은 의형제를 맺고 결의한다. 의형제편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 자체가 독립된 한편의 중편 소설로 보아도 좋을 만큼 완결된 장르다. 임꺽정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개된 이들은 일곱 두목이 된다. 7, 8, 9<화적편>으로 청석골 화적패가 본격적으로 결성돼 활동하는 핵심적 부분이다. 청석골 화적 두령이 된 임꺽정은 지방 관원들을 괴롭히거나 토벌하러 나온 관군들과 대적하는 등 이야기는 다채롭고 종횡무진 재미가 날개를 단다. 또한 유머와 해학의 극치가 군데군데 배꼽을 잡게 한다. 10<자모산성>은 미완으로 끝난다. 독자들이 지루할 사이도 없지만 박재동 화백의 삽화가 엄청난 상상력에 활력을 부어주었다. 다양한 시각에서 풍부한 속담을 사용하고 접속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솜씨하며 식민지 시대에 식민본국의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 우리말로 쓴 임꺽정이야말로 어문학적 가치를 더해 준다. 구어체의 문장과 그 시대의 어휘들이 살아 빛을 발한다. 정교하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토속어들이 꾸임없이 질박하고 단순한 문장, 그 언어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인쇄 4판이 거듭되면서 한글 맞춤법이 국가 차원에서 몇번씩 뒤바뀌다 보니 본래의 맛과 멋이 뼈대만 앙상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 속에는 민속학적 자료들도 많고 노래 속담 전설 등 당시 민중들의 생활이 나오고 등장인물 또한 장돌뱅이 도둑 무당 가객 예인 등 온갖 민중이 등장한다. 전체적 흐름이 문장과 그 시대의 생생함이 원초적이고 말의 거칠음으로 몸둘 바 몰라 묘한 덧에 걸리기도 한다. 수렴청전 기개를 지켜 온 언어로 된 임꺽정 원본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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