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876년경,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야곱은 에굽의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초청을 받고, 식솔 70명을 거느리고 에굽의 고센땅으로 이주한다. 이때는 이집트 12대 왕조의 다섯번째 바로(Pharaoh), 세뉴스렛 3세(Senusret III, 1878-1839 BC)가 치세하던 때였다. 이즈음, 에굽은 이 바로의 탁월한 통치능력으로 군사력과 경제력면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울러, 바로는 에굽인과 차별없이 야곱의 자손, 즉 히브리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평화도 잠시, 기원전 17세기 중엽, 에굽땅에 기근과 각종 질병이 창궐하여 국력이 쇠잔해지자, 각종 신무기로 무장한 셈족(Semitic) 계통의 북방 유목민이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 일대를 점령,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는 이집트의 두번째 ‘과도정부’로서 14대 왕조이다. 그러나 이 왕조는 본토 에굽 출신이 아니므로, 이집트 역사에서는 정식 왕조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임시계보로서 (Hyksos)왕조라 불리운다. 여하튼, 힉소스왕조는 상당히 전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친밀감에서였든지 전(前) 왕조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을 선대하였다.
이즈음, 남부 테베 지역에 거주하던 본토 에굽인들은 왕권회복을 위해 착실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힉소스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전차와 강궁의 제작법 등 군사적 신기술을 배우면서 서서히 이들을 물리칠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원전 157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테베의 애굽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방인 힉소스왕조를 위협한다. 기원전 1549년, 드디어 에굽의 아모세 1세(Ahmose I)는 힉소스를 에굽에서 완전히 쫓아낸 후 제 18왕조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히브리인이 에굽에 정착한지 430년쯤, 이들의 인구는 2백만이 웃돌았다. 당시 에굽 전체 인구가 삼백만에서 삼백 오십만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히브리인의 폭발적 인구증가는 에굽 바로에게는 잠재적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근면하여 농사와 목축업에 뛰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에굽에서 상당한 경제력도 축적하였다. 히브리인들의 유래를 알지 못하는 에굽 신흥왕조로서는, 강성해져가는 이들을 마냥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제 18왕조 투트모세 1세(Thutmose I, 1503-1493 BC)는 히브리인을 힉소스의 잔존세력으로 간주하고, 점진적으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한다. 이러한 차별정책은 강제부역에서 나타났다. 왕조의 존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두 국고성-비돔(Pithom), 라암셋(Raamses)-을 건설하는데, 히브리인들은 이 대형 국가사업에 강제징용되어 혹독한 노동착취를 당한다. 흙 이기기, 벽돌굽기 그리고 농사일까지 삶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후일 그들이 애굽을 기억할 때 ‘쇠풀무 애굽땅’이라 하였을까?
이무렵, 바로왕 투트모세 1세의 공주 하트셉수트(Hatshepsut, 1508-1458 BC)가 나일강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다. 이복오빠(투트모세 2세, 1493-1479 BC)와 결혼한 공주는 이 아이를 입양한 후, 그녀의 아버지 이름의 끝 두음절을 인용하여 아이의 이름을 모세(Moses)라 불렀다. 이 아이가 성장하여, 후일 히브리인의 정치적, 영적 지도자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하트셉수트의 양아들 모세는 왕의 반열에 서지 못하였다. 투트모세 2세가 후궁 이세트(Iset)를 맞아들여, 아들 투트모세 3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모세는 그의 40세쯤, 핍박받는 동족(히브리인)의 일에 연루되어 에굽인을 살인함으로 졸지에 쫓기는 몸이 된다. 40년간 긴 도피기간 중, 시내산에서 그의 나이 80세에 ‘스스로 있는자’(야훼)로부터 소명을 받는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출 3:10).
모세는 신(神)적 능력으로 바로 투트모세 3세(1479-1425 BC) 면전에서 9가지 재앙으로 에굽을 경악케 한다. 그러나 바로는 걍퍅했다. 마지막 수단은 애굽의 모든 생물의 장자를 멸하는 것이다. 대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들의 장자는 살아남았고 모든 애굽인의 첫소생은 죽었다. 이 사건은 영원히 기념될 이스라엘의 유월절(Passover) 예식이 된다. 공황에 빠진 바로는 마침내 히브리인들에게 떠날 것을 허락한다. 이때가 기원전 1446년경 이다.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이동하기에는 인원과 물량이 너무 많다. 성경기록을 보자. 인원면에서 보행 가능한 장정만 육십만명이다. 부녀와 노약자를 고려하면, 족히 이백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축도 데려가야한다. 도로개념이 없던 그 당시 이 행렬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 행군길이가 무려 110km 이상이다. 이 규모의 이동은 어떤 신탁(神託) 없이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모세 한사람으로는 불가함을 알기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가 역사에 직접 개입한다.
이 탈출기는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라 2단계로 나누어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될 듯 하다. 즉, 1단계는 에굽 고센(Goshen)에서 부터 비하이롯(Pi-hahiroth)까지의 노정, 2단계는 추격 및 홍해(Red Sea) 도하작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동로 분석에 들어가 보자. 당시 에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지중해변을 따라가는 소위 블레셋 길(The Way of Philistines)로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블레셋길에는 중요지점마다 애굽의 전초기지(Migdol)가 설치, 운용되고 있었다. 이 군사기지는 외부세력의 에굽진입을 사전에 차단하고, 대상로(隊商路)를 보호하며, 팔레스타인이나 아라비아 반도로의 진출을 위한 중간 기지로서 이용되고 있었다. 두 번째 길은, 고센에서 수에즈만의 북단을 거쳐 시나이 북부를 통과하여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첫번째 길보다 멀기는 하나, 노정에 큰 장애물은 없다. 이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면 행군 여정은 고달프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강한 적을 만날 경우, 겁에 질려 에굽으로 되돌아갈 것을 미리 아시고, 다른 길을 예비하신다. 모세를 통하여 예비하신 길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홍해(아카바만, Gulf of Aqaba)를 건넌 후, 미디안(Midian,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을 거쳐 가나안으로 북행하는 우회로였다. 많은 인원이 이동하기엔 불가능한 루트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드디어 히브리인들은 430년간 애굽생활을 마감하고, 모세의 영도로 탈출 및 이동을 개시한다. 이들은 대오를 지어 질서정연히 이동했다. 고센땅 라암셋에서 숙곳까지 360km를 9일만에 도달한다. 통상, 무장한 보병이 시간당 4-5km 속도로 하루 8시간을 행군할 경우 40km 이동한다. 히브리인들은 오늘날 보병이 이동하는 속도와 동일하게 행군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기전 에탐(Etham), 믹돌(Mikdol)까지 160km를 순조롭게 이동하였다. 이들에게 주어진 양식-현대전의 비상식량(C-Ration) 개념-은 누룩을 넣지않는 빵이 전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불평불만없이 잘 견디었다.
에탐에서 믹돌까지 30km를 행군한 다음, 믹돌 감제고지에 경계병을 두고, 바알스본이 마주보이는 비하히롯(Pi-hahiroth)에서 전 백성이 숙영한다. 이곳은 종심이 9km, 폭이 5km로(서울 여의도의 5배 규모) 모든 인원과 생축을 수용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이다. 긴 행군끝에 처음으로 만끽하는 달콤한 휴식이다.
이즈음 신탁이 계시된다. 여호와는 애굽인과 히브리인 모두에게 그의 영광을 보이고자 하였다. 곧이어, 바로는 본 정신을 회복하였으며, 히브리인의 해방을 후회하게 된다. 마침내 바로는 군대를 직접 지휘, 히브리인 추격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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