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포드 영어사전이 201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건 ‘이모지(emoji)’였다. 사상 처음으로 영어가 아닌 단어를 선정했다. 일본어로 ‘그림 문자’를 뜻하는 이모지는 파격적인 선정이다. 물론 2013년에 셀카를 의미하는 ‘selfie’를 선정했고 작년에는 전자담배 연기를 뜻하는 ‘vape’를 선정해 트렌드를 반영해왔다. 올해 이모지는 시대 변화상을 더 보여주는 것이다.
이모지는 일본의 통신 회사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올해 급속도로 퍼진 이모지는 ‘이모티콘’과 종종 혼동된다. 구분하자면 이모티콘은 컴퓨터 자판기 부호를 조합해내 형상을 만든 것이고, 이모지는 처음부터 사물이나 표정 등을 단순화한 그림이다. 문자 메시지, 카톡과 같은 대화에서 이모지로 더 간략하고 빠르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 휴대폰 사용자들에게 이젠 필수품이다. 또 이모지는 갈수록 더 다양하면서 정교한 형상을 생산해내 언어 수를 늘려가고 있다. 단순한 단어나 표현을 넘어 책 읽어줄 정도의 내러티브를 이모지 조합으로도 만들어낸다.
‘문자가 감정 표현 수단으로 부족하거나 매력이 없어 보인다’는 게 이모지 사용자들의 주장이다. ‘기뻐서 운다’고 말로 하기보다 스마일 얼굴 모양에 눈물이 흐르는 형상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확 와닿는다는 것. 실제 이 눈물 흘리며 웃는 이모지는 올해 미국과 영국에서 전체 1천여개 이모지 중 20%의 사용량을 보일 정도로 인기 만점이었다.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는데 있어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찬사까지 이어질만 하다.
최근 한국에서 ‘100세 인생’이란 노래가 급인기다. 25년 무명의 여가수가 부른 트로트 분위기 노래인데 가사나 곡조가 단순하다. 가령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로 시작되는 가사가 70세, 80세, 90세, 100세로 바뀌고, 못 간다는 이유도 ‘할 일이 남아서’ ‘알아서 갈테니’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등으로 바뀌며 그걸 ‘전해라’로 끝낸다. 너무 단순한데, 100세를 살고 싶은 인간의 속내가 반영된 듯 애창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이모지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인터넷 유저간 대화창에서 노래하는 이 여가수 모습에 다양한 이유의 ‘전해라’가 담긴 이미지가 사용 중이었다. 누가 만나자고 하면 ‘바빠서 못간다고 전해라’ 이미지를 대답 대신 넣는 식이다.
덕분에 ‘뭐한다고 전해라’는 패러디도 넘쳐난다. 낡은 방식의 노래인데 현 세태에서도 유명 소재가 된 게 아이러니하다. 100세 열망에, 말이나 글자보다 더 쉽게 거부를 표현하는 젊은이들이 대용품으로, 그리고 카톡이나 톡방에 어울리는 아이템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추세가 ‘응답하라’ 시리즈에 오면 의문으로 바뀐다. ‘응답하라’는 이전에 1994년, 1997년을 불러내 대화를 시도하려 하더니 올해는 1988년을 불러내려고 드라마로 만들어 인기몰이 중이다. 1988년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핸드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다. 현대에선 매일 사용하지 않으면 불안한 페이스북이나 카톡이란 것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런 불편한 과거를 불러내 재현하는 드라마가 인기 폭발인 이유는 뭘까.
그 때의 노래, 그 때의 복장, 그 때의 마을, 그 때의 사람들, 그리고 그 때의 관계와 사랑이 그리운 것이리라. 첨단 기계 속에서 그림 문자와 손가락으로 대화하면서도 내심 옛 것이 그립고 애틋했던 것일 수도. 만져지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전파’로만 교류하던 이들도 서로 부대끼며 정감있는 그 때의 사람들, 그 관계들이 신기하면서도 좋아보이는 모양이다.
곧 크리스마스 연말이다. 새로운 관계든, 회복해야 할 관계든 서로를 등불처럼 밝혀주며 미래를 축복해줘야 할 때다. 그러나 연말 새해 카드도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그림을 카톡으로 보낼 공산이 크다. 손가락 몇번 움직이면 해결되니까. 솔직히 글로 직접 쓰려면 이제 생각도 안나고, 펜도 버벅대고, 그리고 귀찮다. 이전에 사랑과 감상을 앓느라 하룻밤에도 일기장에 수십장 끄적이던 ‘편지의 달인, 글쓰기의 달인’이라도 이젠 한 두 줄 써내려가기도 벅차한다.
그게 슬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대가 첨단화되면서 많은 걸 누리지만 또 많은 것을 잃고 있는 듯한 이 상실감. 분명 편리해졌는데 사람들 사이, 관계에서의 포만감은 사막의 모래처럼 푸석대기만 하니.
나도 ‘웃으며 우는’ 이모지가 필요하다. 아니면, 대신 전해라. 내 젊은 날의 열망과 감상아, 응답하라고.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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