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서 느낀 역사의 두 그림자 - 1.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서_오원성

2015년 여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암살’을 뒤늦게 감상할 수 있었다. 
줄거리는 1930년을 배경으로 독립군이 주요 친일파와 일본군을 암살하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왜 이들을 암살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이 영화는 옛 선조들이 젊은 나이임에도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다하는 모습이 통쾌했으며, 우리에게 애국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진 않았지만 보고 느낀 점은 바로 ‘나라 사랑’이었다.
아버지들의 힘겨운 삶을 위로 했기에 참으로 고마웠던 영화 ‘국제시장’에 이어,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독립투쟁을 다룬 영화가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랑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정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켰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라는 역사의 두 그림자를 등장 시키면서, 독립투사의 숭고한 정신을 돌아 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일본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함께 하면서, 한편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지만, 또 한편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오지랖을 떨고 일본 놈보다 더 악질적으로 같은 민족을 괴롭히며 잘 먹고 잘 살던 ‘매국노’가 있었다. 이정재가 연기한 밀정 염석진은 독립군이었다가 이중스파이로 변절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친일파의 모습이었다. 이런 역적들을 청산하지 못한 채 광복 70년을 맞이했던 마음이 아직도 서글프기만 하다. 
독립군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였다. 이 영화를 통하여 ‘김원봉(金元鳳)’이란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는 1898년 9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3살(1908년 11월)에 천황 생일날 일장기를 변기에 버렸다는 이유로 초등학교를 퇴학 당한다. 경성 중학교를 졸업(1916년)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21살(1919년)의 나이로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裂團)을 조직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핍박한 자들을 암살하고, 부산경찰서와 동양척식회사 폭파, 밀양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총독부습격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홍길동만큼이나 신출귀몰한 행동에 당시 현상금이 100만원이었다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0억원이라 하니, 김구의 현상금이 6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왜놈들이 그를 잡으려 얼마나 혈안이 되었던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1등 공신이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월북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건만 정치이념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통일된 나라를 만들려고 김구와 함께 협상하러 북으로 간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곳에 남아 김일성을 돕는다.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는 신탁통치를 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를 곳곳에 재등용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친일파 악덕경찰의 대명사였던 노덕술은, 자신을 암살하려했던 그를 좌익(과격하고 파괴적인 공산당을 가리키는 말)이라 누명을 씌워 고문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였다 한다. 그는 북에서 노동당 최고위직을 역임했지만, 김일성과 대립하다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1958년, 당시 61세) 당하면서 애국열사(국립묘지에 해당함) 무덤에 묻히지도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라 하겠다. 
이 영화를 통하여 또 깨달은 것은 여성독립운동가의 활약이었다. 여성은 숫자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남자들 못지 않은 공적을 남기었다. 여자 안중근으로 불린 여성항일투사 안옥윤의 실제 모델은 ‘남자현 지사’라 한다. 1872년 경북 영양군에서 사대부 집안의 규수로 태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분노한 남편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한다. 1932년 국제연맹에 일제의 만행을 호소하려고 왼쪽 넷째 손가락 두 마디를 스스로 자른 후, 하얀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전달한다. 당시 61세로 독립운동가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었다.
또한 박차정 의사를 꼽을 수 있다. 김원봉의 부인으로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아버지(박용한)는 경술국치 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개하여 자결하고, 둘째 오빠(박문호)는 의열단에서 활약한다. 오빠를 따라 중국으로 가서 1931년 결혼한 후,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된다. 전투 중에 적탄을 맞고 상처가 심하여 광복을 보지 못한 채 36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1944년 5월)한다. 해방 후 그의 유골은 고향인 경남 밀양에 안장되었고, 지금도 부산에서는 해마다 추모제를 열고 있다. 1944년 11월 미국 독립신문은 ‘조선의 여자혁명가 박차정 동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칼럼을 실을 정도로 애통해한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였다. 이분들의 삶을 통해 여성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길 바란다.
일제치하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 해방에 대한 강함 염원을 불태웠던 독립투사들.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분들의 항쟁이 모이고 모여 밑거름이 된 결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에 대한 보상도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내어 넋을 기리는 일, 그것이 애국애족하는 후손들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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