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타령, 목줄이나 풀고서 하자구나

1988년 한국은 올림픽을 치렀고 나는 결혼해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내 여정과 반대로 영국에서 모국인 버마(미얀마)로 돌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노동자들의 파업과 함께 전개된 전국 시위에 가담한다. 버마의 ‘8888항쟁’이었다. 병든 노모를 돌보기 위해 귀국해 있던 옥스포드대 졸업생이자 가정주부인 아웅산 수지. 그런 그녀에게 인생 최대 전환점이 생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 것. 민주화를 열망하는 강한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은 그녀는 일약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이어진 것은 군사 정부에 의한 가택 연금과 피선거권 박탈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야당이 총선에서 압승하게 되지만 그녀는 더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런 그녀를 세계는 민주화 투사 최고 반열에 올려놓는다.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
지난 10일 미얀마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은 압도적으로 승리를 한다. 사실상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셈. 그러나 영국인 남편 때문에 그녀는 버마 대통령에 출마할 자격이 아예 없다. 그런 그녀는 “그래도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릴 것이다”고 선언한다. 대통령 위의 대통령이다. 
70세 고령의 그녀에게 무엇이 이런 절대 권한을 줬는가. 부패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얻은 힘이다. 그녀는 ‘공포로부터의 자유’ 연설에서 외쳤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적을 잃고 마는 원인도 바로 이 공포 때문이라고. 
그녀는 세계 정치가들에 대해 참 놀라운 존재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치가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국민의 소망과 희망에 귀를 닫고 정치를 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실랄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 정치가들만의 문제였을까. 
라 보에티의 지적처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었을 터. 독재자라 해도 백성이 그에게 부여한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굴복를 ‘자발적 복종’이라고 규명한 그는 참고 견디는만큼 압박받는다고 질타했다. 강요해서가 아니고 스스로 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굴욕에 익숙한 습성도 생긴다고.
맞다 보면 더는 맞기 싫다는 두려움에 사람은 지레 굴복한다. 이게 공포 정치, 군부 정치의 파워다. 문제는 당하다 보면 굴복하고 순해지고, 그리고 무뎌진다는 점이다. 나중에는 작은 친절에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고분고분함마저 갖게 된다. 고문 당하는 이의 굴복을 노래한 어느 시인도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고 슬퍼했다. 그는 경험으로 말한다. 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 
아웅산 수지의 총선 승리가 나오자 한국의 정치가들은 모두 그녀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함께 찍은 사진들을 서로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아웅산 수지조차 현실 정치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등돌림을 받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이상을 품었던 국민들이 그녀의 현실 정치에 회의를 품었기 때문. 하긴 그건 민주화 투사로 대통령이 된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인 결말이다. 한국의 ‘선생님’으로 불리던 대통령도, 넬슨 만델라도, 레흐 바웬사도. 현실 정치와 이상과의 괴리를 넘어서지 못한 투사들이요, 나의 실망이었다. 
공자의 지도자관도 이상일 것이다. 덕으로 정치하는 것을 비유해 “북극성은 그곳에 그대로 있지만 뭇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다”는 말. 그 대표적인 사람이 순임금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천하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데, 그러나 그도 아무 것도 안한 게 아니다.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 있었을 따름이다. 백성들과 신하들의 마음을 얻어내는데 주력했다는 뜻이다. 
법으로, 형벌로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려 한다는 말이 있다. 부끄러움은 여전히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덕과 예로 다스린다면 부끄러움인 ‘치(恥)’를 알게 돼 ‘치(治)’가 이뤄진다는 정치학이다.  
미국 대선이든, 한국 대선이든, 한국 국회의원 선출을 위한 재외선거든 ‘북극성’과 같은 인물을 기다리는 건 사치스런 생각일까. 많은 실망의 기억이 뇌리에 남아서이리라. 좋은 지도자 바라는 게 당연한데도 눈치를 보는 건 웬 공포정치 습성인지 모르겠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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