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병이 도졌나보다. 모처럼 내린 가을 찬비에 우수수 져버린 꽃잎들만큼이나 한없이 낮아지고 쓸쓸했다. 바람 한점도 없는데 고요한 뜨락에서 나만 깊이 흔들렸다. “익숙해질 때쯤 떠나야 하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맥락없는 헛헛함에 울음 터질듯 감성 충만인데 슬리퍼를 끌고 나온 아들아이가 찬물을 쫘악 끼얹었다.
“엄마! 이 누나 완전 예쁜데? 이 누나 누구예요?” 아들아이 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들아이는 묵은 사진첩의 사진들을 컴퓨터 파일로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 프로젝트로 말할 것 같으면 목하 내가 죽기전에 해야할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인데 아들아이가 도와주는 중이었다. 침침해진 눈으로 찡그리며 들여다보니 그녀는 예뻤다. 내가 봐도 심하게 예뻤다. 뉘 집 딸인지 완전 멋진 거다.
“아들아! 그 누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굴발 옷발 사진발 작렬하던 최선생댁 셋째 딸(필명은 남편의 성을 따서 김씨가 됐지만 내 본명은 최씨다) 뭇 남학생들의 여신님, 마성의 누님이었던, 자고로 오늘날의 네 어마마마 되시겠다. 얼마나 예뻤으면 그 누님이 지나가면 동네가 다 환해진다는 소문이 분분했었겠느냐” 장난치느라 심하게 설레발을 쳐대니 아들 아이는 기도 안 차다는 표정으로 당시의 무성했던 소문(?)을 단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 한국말이 어눌한 아들놈의 말을 통역하자면 대충 이런 뉘앙스였다.
“어마마마! 이 예쁜 누님이 어머니라면, 소자는 요즘 대세인 탈랜트 김수현이라고 하옵니다” 이람서 아들아이는 내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도통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눔이 나를 들었다 놨다 어퍼컷 훅 날리곤 시종 모르쇠다. 심하게 과장을 하긴 했지만 사진 속의 그녀는, 아들놈이 그토록 감탄해마지 않는 그 예쁜 누나는 분명히 여고시절의 나란 말이다. 내가 분명하단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아들아, 이 에미도 한때는 그렇게 순정만화를 찢고 나온듯 까지는 아니여도 무얼 해도 빛나고 어디에 있어도 그렇게 예뻤던 청춘이었단 말이다. 사실이면 뭐하나, 알면 뭐하나. 다 과거형인데…… “그녀는 예뻤다”
잡티 가득한 얼굴, 깊어져가는 주름, 희끗거리는 머리,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이즈음의 나를 보노라면 달라도 너무 다른 여고생이었던 나를 아들아이가 자기 엄마로 연상하기란 쉽지가 않을 법도 하다. 나이 들어가는 걸 두려워하거나 불평해 본 적은 없었다. 젊은 날의 불안과 격정을 넘어서 순하게 늙어가는 이즈음, 고요하게 나이 들어가는 평화랄까 기쁨까지는 아닐지언정 중년의 나날들을 ‘인생의 선물’처럼 수긋이 받아들인다. 그렇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문득 우울해질 때의 나의 감정은 이 변덕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내게 지인이 “그녀는 예뻤다”란 드라마를 봐보라는 카톡을 보내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내게 이 드라마를 보면 쉽게 시간이 잘 갈 거라며 적극 권유했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데다 제목부터 그렇고 그런 빤한 줄거리가 연상되서 선뜻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아이에게 수모(?)아닌 수모를 겪고 보니 불현듯 그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시작된 드라마 삼매경! 에이, 역시나 뻔한 스토리로구나~시간이나 떼워보자 했는데 뜻밖에 재미있지 뭔가? 여주인공 혜진은 어렸을 적 정말 예뻤었다. 거기다 착하기까지! 남자 주인공 성준은 뚱뚱하고 못생겨서 늘 왕따였다. 외롭고 주눅들어 있는 그에게 예쁜 그녀가 곁을 내어준다. 성준이 비를 맞을 때 함께 비를 맞아주는 유일한 친구가 혜진이였다. 둘은 비밀한 우정을 쌓아가며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그러다 우여곡절 성준은 유학을 떠나고 오랜 세월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다 어른이 되어 재회하게 된다. 인생이건 드라마건 반전이 없으면 재미없지! 뚱뚱하고 못생겼던 성준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모델처럼 잘 생기고 멋있어진 성준. 반면 혜진은 지난 세월, 집안의 몰락으로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과거의 예쁜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누가봐도 못생기고 초라해져버렸다. 혜진은 오랜만의 재회 장소에서 자신을 몰라보고 지나치는 성준을 보고 숨어버린다. 우연찮게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된 성준과 혜진. 혜진은 못난 자신을 감추려들지만 성준에게 자꾸만 들키게 된다. 모습은 감출 수 있지만 착한 향기만은 숨길 수 없었던 듯 그녀의 예뻤던 향기를 성준은 매순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성준에게 혜진은 “그녀는 예뻤다”가 아니라 “그녀는 예쁘다”가 되었답니다. 성준에게 혜진의 아름다움이 과거형에 그치지 않고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외모보다는 마음이 예뻤기 아니 예쁘기 때문이었다.
그렇담 자칭 한 미모했다던 작가 최모씨! 아들도 못알아보는 그녀의 과거 미모는 워치게 된 겨? 쩝, 그러니께 자고로 맴씨를 예쁘게 써야하는디… 그라고봉께 이것은 칼럼이 아니라 지금은 몹시 안 예쁜 그녀의 반성문인가 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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