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영 l 내일은 없다

슬초맘은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본다고 해도 아무 생각없이 하하 웃으며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메디나 시트콤을 볼 뿐입니다. 이유는 제가 살아가며 보고 겪어 온 현실들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들보다 더 드라마스러울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 스스로도 나름 다이나믹한 삶을 살아 왔고, 또 주변 이들 역시도 드라마에서나 나올 듯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갓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신앙을 갖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 무의미해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나름 헤메이던 시절, 큰 종합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흰 천에 덮힌 채 침대에 실려 밀려 나오는 고인과, 오열하며 그 뒤를 따르는 유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처음 볼 때에는 무서웠는데 자주 보다 보니 덤덤해지더군요. 고인 및 가족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된 경우도 몇 번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열하는 가족들의 외침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더군요.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침대인 경우 대개 연세드신 노인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 유가족들은 대부분 “고생만 시켜드려 죄송하다” “잘 해드리지 못해 한이 된다”며 우시더군요. 반면 무슨 연유에서인지 응급실로 들어와 바로 사망한 경우, 혼비백산 달려 들어 온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억울하다”, “이렇게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고인이 평상시에 원했던 것을 아직 해 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버렸다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슬초맘은 이후 신앙을 갖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 때의 경험은 슬초맘의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죽음 이후에 열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성경 역시 각자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시기에 대해 이렇게 확실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거기에 슬초맘의 손에 화상 자국을 남긴 자동차 사고와 슬초빠의 갑작스러운 혈액암 투병 경험은 생생한 시청각 시뮬레이션 교육을 더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슬초맘의 경우, 신앙을 갖고 죽음과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부인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살아가게 하는 좋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생에서의 삶에 대한 시각과 기준, 즉 모든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더군요. 그리고 슬초맘은 바로 그 부분이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현세 중심적 기복형 종교와 구별되는 핵심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슬초맘에게 이 땅에서 살아 갈 ‘내일’은 없습니다. 신앙인인 슬초맘의 삶의 근본적 소망은 바로 죽음 이후에 눈을 떠 맞이하게 될 ‘내일’이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지금만큼은 슬초맘에겐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슬초맘이 ‘오늘’ 더욱 치열하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용서하고, 치열하게 섬길 수 있게 된 비밀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바로 가족이나 사람과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다시는 ‘오늘’이라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기본 전제는, 오늘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배려하고, 그들에게 먼저 고백하게 합니다. 바로 그 기본 전제가, 혹여 그들을 내일 떠나 보낸다고 할지라도, 혹은 내일 내가 먼저 그들을 떠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아쉽지 않을만큼 사랑하고 아끼며, 그들 마음 깊은 곳의 소원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합니다.
찬바람 솔솔 부는 가을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오늘’이 주어졌습니다. 사랑하기를 미뤄야 할 ‘내일’은 없기에, 슬초맘은 오늘도 더욱 치열히 사랑해 보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늘’의 삶이 바로 작은 천국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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