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린 l 행복 바구니

아직 한 낮은 따갑지만 뜨락의 온갖 꽃들이 열매 맺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누가 뭐래도 가을이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아이와 함께 내년 봄을 위해 갖가지 그 씨앗들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여름내 땡볕에 시달리던 맨드라미와 마가렛꽃은 선선해진 가을 날씨를 봄날씨로 착각했나 봅니다. 온 뜨락에 씨앗을 퍼뜨려서 여린 새싹들이 기세좋게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갓난애기 머리카락이 보송보송 솟아오르는 모습 같아서 어찌나 이쁘던지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이 시간 이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다. ‘너’라는 꽃을 매 순간순간 잘 피우라”며 남편은 꽃갈무리를 하면서도 아이에게 자꾸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어 잔소리를 해댑니다. 꽃 피울 때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때 열매 맺고 거둘 때 거두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언젠가 본듯한 남편의 그 모습을 보자니 뭉텅 옛 풍경이 다가왔습니다.
할머니께서도 가을 무렵이면 알밤같은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습니다. “싹을 잘 티운 놈이 꽃도 잘 맹글고 꽃도 잘 피운 놈이 열매도 실허게 맺는 벱이여. 시방 잘 먹고 잘 놀아야 우리 강아지도 낸중에 이삐게 꽃 맹그는 겨~ ” 그때는 무심상하게 넘겼던 그 말씀이 십 수년이 흐른 지금에야 발아되어 뭉클 가슴에서 솟아납니다. 할머니의 씨앗 보관 방법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비닐봉지에 라벨을 붙여 분류하는 이 손녀 딸을 보면 분명 “씨앗이야말로 참 생명인디 그것들도 숨을 쉬게 해줘야쓰제. 그라고 비닐 봉다리에 너믄 그것들이 답답해서 쓰겄냐” 나무라실 겝니다. 할머니의 씨앗 보관법을 전수해볼까요? 하루 날 잡아서 지붕에 뒹구는 잘 여문 둥근 박을 땁니다. 그리고 유서 깊은 놋숟가락(감자 껍질도 까고 박 속도 긁고…그 숟가락은 둥근게 아니고 끝이 닳고 닳아서 초생달처럼 변해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생 가족을 위해 살다가신 할머니의 생을 닮은 것 같아 숙연해집니다) 으로 박 속을 통째로 파내고 잘 말리지요. 그리고 드디어 뚜껑까지 달아서 그 속에 씨앗들을 봄날까지 넣어두곤 했었습니다. 선들선들 바람이 잘 드는 대청마루 끝에 그 박을 걸어놓고 오며가며 빼꼼히 들여다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씨앗의 안부가 궁금한 게 아니라 잿밥에 맘이 더 컸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께선 깜밥(누룽지)이나 장날이면 눈깔 사탕이며 엿따위를 사다가 그 속에 감춰두곤 하셨습니다. 말이 감춰둔 것이지 할머니의 은밀하고도 위대한 저의 간식 제공처였습니다. 다른 형제들도 자주 할머니네 들락거렸지만그 장소는 오로지 제게만 알려준 말하자면 우리 집 가문의 두 여간첩, 할머니와 손녀딸의 접선장소였습니다. 그곳에 간식이 들어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다른 형제들은 그저 씨앗 보관소라고만 지금껏 알고 있었을 테지요. 내숭 9단에, 입이 돌확처럼 무거운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그 약속을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천기누설을 이지면을 통해 이제야 밝히며 배신감에 잠못 이룰 나의 형제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바칩니다. 사촌까지 통틀어 우리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할머니의 사랑을 가장 가까이서 오래도록 누린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린시절 눈에 띄게 예쁘고 특출나게 영특해서 할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입니다’라고 쓰고 ‘희망사항’이라고 읽습니다. 정작 할머니가 저를 애지중지하셨던 까닭은 그만큼 제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약하고 여리고 맹해서였습니다. 
선생님이셨던 아버진 소문난 효자셨습니다. 학교 관사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할머니 댁에 가는 게 의례 행사였습니다. 바리바리 싸들고 할머니 댁에 가서 위문 공연을 펼치고 실컷 놀곤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항상 이별 공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제가 가족들과 헤어져 할머니 곁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우실 할머닐 차마 혼자 두고 떠나지 못한 아버지께서 궁여지책으로 ‘심청이’를 뽑는 것이었는데 말이 선발전이지 늘 심청이는 저였습니다. 언니와 오빠는 학교에 가야하니까 안 되고 막내는 너무 어려서 안 되고 결연한 어조로 제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우리 다 가버리면 할머니 혼자서 외롭고 무섭고 심심하실 텐데…어떡하지?” 나를 향한 모두의 시선.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어린 맘에도 저는 차마 떨치지 못하고 번번히 주저앉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쌓게 된 남다른 두 여자의 우정이 그 박 속에서 오랜 세월 싹 튼 것입니다. 
저는 어깨너머로 깨우친 한글로 삐둘빼둘 ‘함무이. 사랑해요’ 따위의 쪽글을 써서 그 접선 장소에 넣어두곤 했습니다. 할머닌 “우리 강아지가 써둔 편지 꺼내 읽는 게 할미의 최고 행복”이라며 박꽃만큼이나 환하게 웃곤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나의 행복 바구니! ‘행복의 씨앗’을 보관하던 그 박 바구니! 그 바구니가 그리워서 아니 그 시절 그 온기가 그리워서 뜰 귀퉁이 박을 심었더랬습니다. 이제는 사위어가는 박 줄기를 거두며 둥실 하늘에 떠있는 행복 바구니를 올려다봅니다. ‘함무이! 저 잘 살고 있는 거죠? 저 꽃 잘 맹글고 있는 거지요?’ 슬쩍 할머니께서 기뻐하실 행복 씨앗 편지도 넣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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