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단군 이래 최대 사기범으로 불리는 이가 조희팔이다. 피해자들에게서 도망치느라 야반도주한 중국에서 사망했다고 장례식 영상이 뜬 지 오래다. 그런데 그게 ‘거짓 죽음 쇼’였다는 주장과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죽은 척 ‘시체놀이’를 해서 피해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려 했다는 것이다. 초대형 사기범답다. 자신의 죽음도 사기칠 생각을 했다니 말이다. 이런 사람은 입만 열면 사기고, 무슨 짓을 했다 하면 남 뒤통수 칠 궁리다. 문제는 그의 거짓 죽음을 파헤치고 체포해야 할 당국이 기민하게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돈을 받은 이들이 그 내부에 적지 않다는 말이 믿어질 정도다.
당시 피해액이 4조원대였다. 그는 다단계 사업을 위해 순회 강연이니 교육 등을 통해 “투자하면 짧은 시간안에 엄청난 이윤을 받게 된다”고 사기쳤다. 피해자만 5만여명이었다. 그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던 것인지 어렵게 모은 돈을 조금이라도 불려보려던 민초들이 혹해서 넘어갔다. 피해자 중에는 낙심한 나머지 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이런 사기꾼의 말에 허망하게 놀아난 자기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었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사기꾼을 보면 노자 도덕경의 “믿을만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신뢰하면 안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번지르르한 말에는 분명 속임수가 있다. 떠벌리는 말일수록 의심해봐야 한다. 말이 많아지고 언성이 높아지는 건 상대를 현혹하거나 거짓을 숨기려는 것이어서다. 사실 진리와 진실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 치장을 해야 빛이 나는 건 그 자체가 진리도, 진실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도 지나치게 말이 앞서고 있다. 검인정 교과서든 국정 교과서든 정확한 역사관을 심어줄 치우치지 않는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숙제다. 당연히 공방전은 필요하다. 문제는 공방전의 초점이 변질돼, 정치적 ‘색깔’ 비난으로 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 선조에 대한 공격도 서슴치 않는 양상이다. 대통령 아버지가 친일 독재자였고 여당 대표 선대가 친일이었다고 공격하자 야당을 대표하는 전 대통령 장인이 좌익 활동가였다고 맞받아 비난한다. 이들 선조의 과거는 역사 교과서에 새로 실릴 것도 없는 것인데 현 교과서 논쟁의 주제로 떠올라 공방 핵심이 된다는 게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후세를 위한 교과서를 만들어야지 선조를 위해서 만드는 게 아닌데 왜 선조들의 과거를 들쳐내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이냐는 말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소모전일 뿐이다. 사실 비방은 쉽다. 좋은 점을 찾아 쓰기보다 과오를 들쳐내 비판하고 단죄하는 게 더 신나보인다. 칭찬은 만 사람의 입이 모여 이뤄지지만 비방과 헐뜯음은 한 사람의 입만으로도 순식간에 번져나간다는 방유일순(謗由一脣)이 맞는 말이다.
그게 역사서든 현실의 삶에서든 반성과 의식을 위한 비판적 시각은 필요하다 쳐도 되도록 과업과 성과를 부각시켜 희망과 지침을 제시하는 쪽이면 좋겠다는 바람은 너무 순진한걸까.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만 비방하고 따지는 건 역사적으로나 현실에서도 끝없는 혈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공격받으면 대들며 더 세게 대응하려는 게 인간이다. 결국 양쪽 다 피를 보며 나자빠져야 끝이 나고 만다.
말을 조심하자던 노자도 자기 스승이 죽기 직전 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마지막 가르침을 달라고 하자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보여주었다. “혀가 있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니 다시 “이빨은 있느냐”고 물었다. 늙어 죽게 됐으니 이빨이 남아있을 리 없다. 노자는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쳤다. “아, 강한 것은 없어지지만 부드러운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구나.”
부드러움의 철학이 생긴 이유다. 이빨처럼 강한 것은 세월이든 반발이든 맞공격을 받아 언젠가는 깨지고 사라지고 말지만 부드러운 혀는 절대 없어지지 않고 제 역할을 한다는데서 얻은 철학이다.
어디 현 세상은 그런가.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들로 서로를 물어뜯느라 부딪히는 소음으로 귀 아프다. 이빨에 물린 피투성이 상처들, 그게 아프다고 또 울부짖는다. 이제는 유연한 사고니, 부드러운 지도력이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이니, 인내와 겸손이니 그런 말하면 우습게 여김 받는다. 강경한 이빨에 씹히는 혀처럼 물렁하게 치부된다. 더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야 살아남는 줄 안다. 물리더라도 참고 진실을 품고있는 혀가 훗날을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른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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