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단상: 윌리엄 윌버포스의 위대한 영향력 [김형민 목사 덴튼한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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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1787년, 그의 나이 27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 사명을 받는다. 하나는 대영제국의 막대한 수입원이었던 노예제도의 폐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제도적 사회악을 개혁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지녔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걸게 된다. 그리고 윌버포스의 삶을 통해 한 명의 헌신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지 보여주었다. 윌버포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극렬히 반대하는 수많은 정치인들과 기득권자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끝내 관철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강직한 성품, 그리고 그의 리더십 때문이라고 필자는 본다.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의 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런던 근교에 거주하고 있던 삼촌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복음적이고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삼촌과 이모의 영향을 받은 윌버포스는 12살 되던 해에,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영접한다.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한 그는 1780년, 21살의 최연소 나이로 영국 하원에 입성하게 된다. 죤 뉴턴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에서 끌려오는 노예들의 참혹상을 듣고, 28세가 되던 1787년부터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의회에서 노예제도의 죄악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노예제도 폐지를 외쳤지만, 노예제도 폐지안을 상정할 때마다, 번번히 좌절되곤 하였다. 당시 영국 국가수입원의 3분의 1이 노예무역을 통해 충당되고 있었고, 수많은 정치, 경제 기득권자들이 노예제도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철옹성 같은 벽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들의 끊임없는 중상모략과 협박,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암살 시도도 있었지만,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윌리엄 피트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모든 역경을 이겨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1833년, 대영제국 내에서 모든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 지 46년 만의 결실이었고, 그는 영국에서 노예가 해방되는 것을 목격한 후 웨스트미니스터 교회에 묻히게 된다. 그의 개혁은 노예제도 폐지에 국한 되지 않았다.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제도들을 개혁해 나가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윌버포스는 의회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2시간씩 하나님 앞에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리더십을 발휘해 철옹성같이 보였던 노예제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오늘날 미주와 한인 사회에서도 제2, 제 3의 윌리엄 윌버포스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나와 세상의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고, 세상의 부패한 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소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나오길 소원한다. 

김형민 목사
덴튼한인침례교회
972-488-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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