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린 l 이런 ‘갑질’봤소?

아침 햇살에 빛나는 텃밭의 붉은 피망과 토마토와 민트, 레몬밤이 오늘 아침 식탁에 오를 ‘님’들이다. 아이구야. 엄청 고생했구먼. 고마워~ 남편이 조심스레 야채들을 따면서 ‘님’들에게 고마운 맘을 전한다. 그야말로 가족에게 무공해 음식을 제공하는 고마운 ‘님’인 것이다. 흡사 아이를 갓 낳은 산모를 대하는 듯하는 남편의 모습에 슬몃 웃음을 깨문다. 얼마전 아버지가 손수 길러 보내오신 비트까지 곁들여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토마토와 피망, 민트와 레몬밤 거기에 치즈를 얹었더니 색깔부터가 식욕을 자극한다. 붉고 푸르고 하얀, 그 절묘한 어울림. 남편이 만든 진자주빛 비트 쥬스까지 곁들이니 색들의 향연이 따로 없다.
마침 가까운 친구가 남편과 함께 찾아와 소박하지만 무공해 아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기쁨이 배가 되었다. 그녀도 평소 꽃을 좋아해 이런저런 꽃들이나 정보를 스스럼 없이 나누는 절친 꽃 동무(?)라서 식탁의 화제도 역시나 꽃들의 뉴스로 풍성했다. 담소 끝에 동무는 문득 남편을 향해 불평을 터뜨렸다. “저 뜰 좀 보세요. 얼마나 바깥 주인의 손길이 많이 갔는지 한 눈에도 느껴지네. 도와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나 몰라라하니 나 혼자서는 버거워서도저히 폼나게 가꿀 수가 없다니까!” ‘등나무 타고 올라 갈 아치 좀 만들어 달래도 대답만 하고 아직도 무소식, 무성한 가지 좀 쳐달래도 여지껏 산발한 백일홍, 비만 오면 물구덩이가 되는데도 물길을 안 터줘 나무가 죽고 말았다’는 둥 꽃 얘기로 시작해서 이야기의 불길은 점점 애먼 데로 번져나갔다. ‘벗어 놓은 옷은 뱀 허물처럼 뒹굴지, 식탁 의자는 식사 후 제 자리에 넣어달래도 늘 빠져 있지… 서류뭉치며 공구 따위도 아무 데나 늘어져 있지 등등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잔소리를 해도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루는 출근한 남편이 저질러놓은 물건들을 치우다 말고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단다. 어찌나 열 받든지 남편이 어질러 놓은 범행 현장을 낱낱이 찍어서 카톡으로 전송했단다. 때마침 직원들과 회의 중이던 사장님(동무의 남편)은 ‘카톡카톡카톡카톡’ 깨방정스런 소리와 함께 벗어놓은 바지며 팬티며 연달아 수 십장의 해괴한 사진이 전송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이 무슨 황당 시츄에이션인가. 순간 아내가 제 정신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단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평소의 교양있는 아내로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부부의맞고소가 시작되면서 점점 분위기가 달콤살벌해지자 평소 남편들의 ‘공공의 적’이라 불리우는 남편이‘갱년기엔 여자들 목소리가 커지더라구요’ 라면서 누구 편을 드는 건 지모를 애매한 화제 전환을 했다.
‘바야흐로 아내들이 갱년기 아닙니까? 여성 호르몬은 줄고 남성 호르몬이 왕성해져 목소리가 커지고 드세진다는 여자의 갱년기 말입니다. 제 아내도 순하던 사람이 이젠 목소리가 커져서 종종 날 당황스럽게 해요. 갱년기의 아내들이니 그러려니 잘 이해해줘야 합니다.’ 얼른 들으면 내 편을 드는 것 같은데 새겨 듣다보니 어째 기분이 묘해졌다. 아니 이 양반이 시방 친구의 갱년기를 빙자해서 갱년기 마누라 비행을 고발하는 거 아녀? ‘금방 기분이 좋다가도 이내 쓸쓸하다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질 않나 툭하면 쌈닭처럼 어슬렁어슬렁 시비거리를 찾아 털을 곧추 세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떴다하면 뭐라 하지 않는데도 공연히 눈치를 보며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된다나? 남편의 말을 빌면 단연코 우리 집의 ‘갑’은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엄마이거나 마누라! 결국 “나”라는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시방 내가 식구들 헌티 말로만 듣던 그 훌륭한 ‘갑질’을 허고 있다는 거여, 뭐여~
 ‘뭐, 갑질이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당신 말대로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점잖으신 남편의 최후 변론! 아놔~ 내 일평생, ‘을’동네서 ‘을질’만 잘하며 노는 줄 알았는데 내가 갑질을 하는 날이 다 있다니. 이왕 하는 갑질, 좀 더 끈끈하게 해봐? 이보쇼. 을양반. 뜰로 좀 나와보시우. 너른 데서 후반전 뛰어봅시다. 이 ‘갑순이’ 주먹 맛을 제대로 보여줄팅게. 전의를 불태우며 손님들을 몰고 뜰로 나가자 남편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아주 훌륭한 ‘갑’이라는 말이지… 말입니다’ 때늦은 변명을 했다.
뜰에는 여름내 맹렬하게 내려쬐던 햇살은 오간 데 없고 포슬포슬 말갛고 순해진 아침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결도 한결 고슬고슬했다. 눈치 빠른 꽃들은 진작부터 밀려오는 가을을 알아채고 있었던 듯 씨앗 맺기에 온전히 집중하는가 하면 여느 꽃들은 새삼 생기롭게 꽃을 틔워내고도 있었다. 땡볕을 견딘 지난 여름 공적을 장하게 밀어올리는 것이다. 지난 시절 살아온 이야기를 그렇게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매달린 씨앗들이, 매달린 꽃들이 곧 그들을 지탱해준 뿌리의 지난 시간이기도 하니 허투로 대할 수 없지 않은가. 고맙고도 짠하고도 뭉클한 생명들. 거저 주는 그 감동 앞에 꽃들의 진정한 그 ‘갑질’에 우리는 어느 결에 전의를 상실하고 다 같이 ‘을’의 자세로 엎드려 오래오래 꽃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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