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친구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를 믿고 사업적 파트너를 믿는 믿음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라는 인식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인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공동체에서 함께할 때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틀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다양한 삶 속에서의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로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정형화 되어 간다.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집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렇듯 개개인의 경험을 통한 인식의 틀은 점점 고정관념으로 생각 속에 토착되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역을 하다 보니 이 인식의 틀이 종종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의가 부족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상당히 불편해하고 함께하기를 꺼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러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매번 상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기질이 다양하며 지식과 재산의 유무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자신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원리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의 판단이 상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무시하는 행동은 하나님 보실 때는 죄다. 왜냐하면 불순종은 죄이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자신의 편의대로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중요시하여 어떤 행동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틀을 말씀 앞에서 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내면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내면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편리한대로 늘 해오던 방식대로 행동을 선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형성된 생각의 틀을 말씀의 틀로 재정비하자. 곧 사랑이라는 틀로 다시 세우자. 이는 많은 마음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완벽하지 않듯이 타인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약점에 대해 보듬어주는 아량을 가지자. 삶의 참된 행복은 서로 사랑할 때 내면에 아무런 갈등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내가 우상이 된 삶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은 결코 느낄 수가 없다. 이 행복은 말씀에 순종할 때 더욱 강하게 경험되어지는 것 같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이타적인 삶은 상대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할 때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 곧 구별된 삶을 원하신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래프 톨스토이도 말했듯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타인의 약점을 보며 비판은 쉽게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확한 자기인식과 함께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생활을 오래한다고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말씀 앞에 더욱 순종하여 아량이 있는 깊은 인격을 지닌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
인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공동체에서 함께할 때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틀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자의 다양한 삶 속에서의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로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 정형화 되어 간다.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집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렇듯 개개인의 경험을 통한 인식의 틀은 점점 고정관념으로 생각 속에 토착되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역을 하다 보니 이 인식의 틀이 종종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상종할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의가 부족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상당히 불편해하고 함께하기를 꺼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러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매번 상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기질이 다양하며 지식과 재산의 유무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자신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원리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의 판단이 상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무시하는 행동은 하나님 보실 때는 죄다. 왜냐하면 불순종은 죄이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자신의 편의대로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중요시하여 어떤 행동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틀을 말씀 앞에서 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내면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내면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편리한대로 늘 해오던 방식대로 행동을 선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하게 형성된 생각의 틀을 말씀의 틀로 재정비하자. 곧 사랑이라는 틀로 다시 세우자. 이는 많은 마음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완벽하지 않듯이 타인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약점에 대해 보듬어주는 아량을 가지자. 삶의 참된 행복은 서로 사랑할 때 내면에 아무런 갈등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내가 우상이 된 삶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은 결코 느낄 수가 없다. 이 행복은 말씀에 순종할 때 더욱 강하게 경험되어지는 것 같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이타적인 삶은 상대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할 때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 곧 구별된 삶을 원하신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래프 톨스토이도 말했듯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타인의 약점을 보며 비판은 쉽게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확한 자기인식과 함께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생활을 오래한다고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말씀 앞에 더욱 순종하여 아량이 있는 깊은 인격을 지닌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
허양희 사모
어스틴 주님의 교회
‘사모행전’
어스틴 주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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