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刑棘)’이라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는 안중근 의사 어록의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혹 입안에 가시가 돋힐까, 한 생을 책을 읽고 그 책이 질곡한 제 이민생활에 버팀목이 됐습니다. 장서 500권을 이민 보따리에 들고 와서 킬린에서 가정도서실이라 이름하여 교민들과 책을 나눠보며 이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민 생활에 책 한권 읽기가 산다는 일에 발목잡힌 우리들에게 무리일지도 모르지요. 선정한 책의 깊이와 폭을 더하고 싶지만 필력도 짧고 여백이 한정되다 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은 88년 초판 발행으로 이민 가방에 챙겨와서 지금까지 제 곁에서 오래 함께 숨쉬며 늘 새로운 감동과 사색으로 남아있는 책입니다.
저자 신영복 선생님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1963년 서울상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강의, 1968년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대에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복역, 1988년 8.15 특사로 가석방 출소, 성공회대학 교수로 역임, 지금은 정년퇴임하셨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출소 전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복역 중 계수씨와 형수님, 그리고 부모님께 드리는 작은 엽서와 편지 글 모음집으로 3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 1 부, 옥담 속의 순록빛 새싹
계수씨에게 보내는 엽서 62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감옥 안을 옥담이라고 표현하신 저자의 정서를 새롭게 합니다. 어려운 관계의 계수씨에게 옥담 속 생활에서 느끼는 사소한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글들은 경탄할 수 밖에 없는 시나 산문이 되어 있습니다. 1982년 2월 17일자 엽서에 ‘일요일 오후 담요를 털려고 나가서 양지바른 곳의 모래 흙을 가만히 쓸어보니 그곳에 벌써 순록색 풀 싹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섬세한 시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조카를 위한 배려의 글에서 획일적인 교육적 지침이 아니라 삼촌이 주는 따뜻하고 훈기 가득한 묘약같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잠자는 토끼를 깨워서 함께 가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사기 대접에 보름달을 담듯이 62편의 간결한 엽서는 옥탑의 육중한 벽을 뚫고 흐르는 맑은 기류가 주는 생 저쪽의 슬픔이 읽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제 2 부, 잔설은 비에 녹아 사라지고
형수님에게 보내는 엽서 55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7, 80년대 보낸 형수님과의 엽서에서 옥탑 속 그들(수인)의 천착된 기형적 삶의 터전에서 그들과의 관계 정립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편지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지식인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삶의 노정에서 덤덤히 견뎌내는 징역 생활을 계절의 변화와 열악한 환경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인내와 포용, 이 모든 사소함이 철학적 사유가 곰삭아서 묻어나오는 글들이 맑습니다. 그곳 험한 세상의 체험들은 사랑이 어휘적 가치가 아니라 행동과 자기혁신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진정한 배움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면서 함께 걸어 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절구에서 실천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하면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지식인의 허약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합니다.
제 3 부, 바깥은 언제나 따스한 봄날
부모님께 드리는 엽서와 편지 83편. 저자의 또 다른 의미가 담긴 편지들을 읽으면서 부모의 마음이 바로 여기 이런 것이구나, 가족의 끈이 무기수라는 그 절망의 한계를 넘나들며 한 가족의 아웃사이드가 아닌 인사이드로 옥바라지를 하는 가족들, 그 위대한 동질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성의 그 간절함과 다함없는 마음, 효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아버지와 아들은 스승이자 세상과의 지적 교류의 남성적 사연들, 수인된 몸, 아들의 편지, 부성, 끊임없이 보내드리는 서책과 자료들. 아버님의 저서 <사명당 일기> 표지의 글씨도 아들이 직접 쓰게해 아들의 존재감을 심어주는 천길 물속 같은 아버님, 가족이라는 따뜻한 신뢰감의 끈, 지극함의 극치인 모성, 서릿발 같은 긴 세월 한을 감추고 자식을 믿고 지켜주는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가족이 해체돼 가는 시대에 가족의 끈이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지는지 알게합니다. 1988년 5월 30일 자로 끝이 납니다.
책 한권에 귀한 사람들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한학의 대가 노촌(老村) 이구영 선생과 4년간 한 방에서 동양학 고전을 배우셨습니다. 짧은 엽서에 담긴 옥필의 저자 진심이 독자를 깨우게 만듭니다. “김유신의 공성보다는 계백의 비장함이 시조나 별곡체의 고아함보다는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에서 민중적 체취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제땅의 끈질긴 저항이 오늘의 역사 인식에 있어서 각별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저자의 역사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효에 대한 자식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같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 이보다 더 효를 나타낼 수가 있을까요. 잔잔하게 마음을 울립니다.
한국 현대 지성사에 한 획을 긋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편지 이전에 역사, 문화, 사회, 철학, 더 나아가 리얼리즘의 극치로 그곳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입니다. 서간문체로 간결하고 날짜별로 된 엽서라 지루하지 않아 추천합니다. 옥담 저쪽에서 비추는 고요한 등불을 마음에 밝혀 넉넉한 가을로 한발 들여놓으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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