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라는 뜻인 영어 ‘READING’이라는 표현보다 나는 ‘INTERACTION’ 상호작용, 즉 교감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책이 아무리 좋아도 내 안에 울림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지영 작가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내게 새벽 종소리처럼 깊은 울림을 준 책이다.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 이후 5년만에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소설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책과의 교감으로 내 몸속에 울리는 종소리를 타고 하늘에서 푸른 사다리가 내려 오는 환영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은 3부로 나누어져 있고 68편의 짧은 단원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W시에 있는 1500년 역사를 지닌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된다. 1부 22페이지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을 반영한다. <이 지상에 유일하게 허락되는 영원에의 통로, 야곱이 보았다는 그 사다리가 소리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듯 했다.> 이 소설은 6.25 전쟁 당시 흥남 철수 때 피난민들이 빅토리호를 타기 위해 매달린 그 사다리의 기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요한과 동기생 마카엘, 안젤로, 세 수사의 서로 다른 신에 대한 갈망이 베네딕도 수도원의 정통성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신의 영역을 확대시키려는 해방신학적 실천으로 수도원 밖의 가난한 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못한 채 수도원과의 마찰을 불러 일으키는 미카엘 수사, 또한 고아로 자랐지만 뛰어난 용모와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수도원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안젤로 수사, 그는 어느날 바베큐 그릴을 손질하려다 그 속에 새 알을 보고 어미새가 불안해 할까봐 오래 전부터 있는 천사의 동상처럼 그렇게 그곳을 지키다 미사 시간도 지키지 못한 사건, 수련장 신부님께 불려가서 “포스트 잇”이란 글을 써서 내미는 수련장 신부까지도 감동시키는 따뜻한 그 부분을 읽을 때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그리면서 나도 깊히 빠져 들어갔다. 작가의 상상력이 소설 속 짧은 이야기에서도 신의 신성을 느끼게 한다. 요한 수사는 어느날 바람처럼 찾아 온 소희를 처음 본 순간처럼 그렇게 사랑이 왔다. 사랑으로 비와 바람을 한 몸에 맞으며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에 갈등한다.
갑작스럽게 미카엘 수사와 안젤로 수사가 교통사고로 죽자 그들의 죽음 앞에 선 요한 수사는 목울대로 급격한 비명같은 것이 솟구쳐 올랐다. “왜? 왜? 왜? 대체 왜?”라고 절규한다. 영혼의 어두운 통로를 걸어 나오면서 소희와의 사랑에도 작은 오해가 생긴다.
요한 수사는 소희와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려는 마음으로 서울 집으로 휴가를 떠난다. <요한 수사는 모든 뼈가 부러진 사자 같았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장은 공지영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깊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요한 수사의 이런 변화를 할머니가 알아차리고 요한과 함께 길을 떠난다. 파주 벌판 아무 것도 없는 황토 벌판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 부지”라는 팻말이 서 있는 곳을 보여주시고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와서 할머니의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할머니가 스무 살 때 6.25전쟁 당시의 그해 겨울 흥남 철수로 빅토리아호에 몸을 싣고 남편과 이별한다. 단신으로 배 안에서 마리너스 선장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고 남하하는 과정에서 그 배에 탄 오천 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거제항에 내릴 때까지의 기적같은 사건들을 할머니는 손자 요한 수사에게 들려준다.
역사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어쩌면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한국 베네딕도 수도원이 미국의 뉴저지 뉴턴 수도원을 인수하게 된 배후에는 역사의 뒤로 밀려난 흥남 철수때의 빅토리아호의 마리너스 선장을 예비하신 하느님의 신비인 것이다. 이 모든 귀결은 완벽한 신의 신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살아있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난 11월 성공회대학에서 공지영 초청 <지금 여기에> 강의를 들렀다. 그녀의 말 중에 “세상에 중립은 없다. 약자의 편에 서야 약자와 함께 살아남는다. 혼자는 절멸한다. 정직하게 느끼는 것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
이런 말들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작가의 의식 속에 미카엘과 안젤로 토마스 수사들과 마리너 선장은 전쟁 후 수도자가 되어 요한과 만난다. 공지영 작가는 <도가니> 작품 외에도 사회현실 참여작가답게 쌍용자동차 해고자 노동자 파업에 관한 <의자놀이>를 쓴 첫 여성 르포르타주 작가이다. 책 판매수입금 4천여만원을 해고자 가족들을 위해 쓰고 함께 고통을 분담한 작가이다.
<높고 푸른 사다리>를 통하여 은닉된 장소인 남성 수도원이 열렸고 노수사들의 신을 위해 한 생을 어떻게 살다 평화로운 죽음에 드는지 신의 섭리와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묘한 여운과 첨예하게 신에 대한 ‘왜?’라는 질문의 해답이 역사적 연결 고리로 신이 답하는 사실적 소설이다. 또한 손에서 책을 내려 놓을 수 없게 민드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전쟁의 참상이 현재 우리들의 안온한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신을 체험하는 묘한 여운의 강도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문 책이다.
그러면서도 소희와 요한 수사의 사랑 이야기가 어떤 독자들에게 연애소설로 치부될만큼 사랑의 감정이 밀도있게 그려진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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