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 잘해 보자며 지뢰 사건에 대해 ‘유감’이라고 사과성 발표를 한 북한은 그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말을 바꾸고 있다. 참석자였던 북한 총정치국장은 TV에 나와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 가지고 상대 쪽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이는 경우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았을 것”이라고 적반하장격 발언을 해대고 있다.
대북 확성기를 중단하겠다는 남한의 약속을 받아내고 난 뒤여서인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있는 모양새다. 역시 믿음이 안가는 상대다. 한국 정부는 도발 재발 방지를 약속 받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자부한다는데, 이번만은 강력한 응징이든 확고한 사과든 한방을 기대했던 국민은 허탈하다. 한가지는 분명해졌다는 것으로 위안해야 할까. 북한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은 자신에 대해 심리전으로 펼쳐지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라는 것.
사실 대북 확성기 방송 내용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는 기본이고 날씨 정보도 있으며 음악도 있다고 한다. 남한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나 한국의 발전상을 홍보하는 내용도 있다. 북한으로서 가장 아프게 들리는 건 북한 사회 실상이나 김정은의 독재 정치 및 정책 실패, 인권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중국만 세번을 방문했는데, 북한의 김정은은 3년 넘게 단 한번도 외국 방문을 못했다는 식의 소식도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사실을 전할 뿐인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꼭 욕을 하고 억지를 피우지 않는 팩트 전달인데도 들으면서 자괴감이나 불안에 빠진다. 이게 심리전이다.
심리전은 전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술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에서도 유방이 초나라 항우 군대를 포위한 뒤 초나라 민요를 불러 항우 군사들의 전투 의지를 흔들어놓고 공격해 승리했다는 심리전의 일화가 있다. 수많은 역사적 심리전 사례가 있는 걸 보면 “선전이란 적을 관통하는 첫번째 화살이기에, 심리적 선전이야말로 적을 상대로 펼치는 첫 번째 전술 단계여야 한다”는 CIA 창설자 윌리엄 도노반의 말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북한을 제재할 수단이 많지 않다고 언급했다. 군사력이나 핵기술 때문에 군사적 해결책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심리전 일환으로 온라인 공격이든, 선전 전단지 배포를 하든 해서 북한 내부 붕괴를 노려보자는 전술을 피력한 바 있다.
물론 미국도 심리전에 당한 전력이 있다. 일본과의 전쟁 중 목소리 좋은 일본 여성들이 방송으로 태평양 주둔 미군들의 전투 의욕을 꺾어놓은 적이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도쿄 로즈라는 아나운서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 하세요, 적군 여러부운~ 별일 없나요? 라디오 도쿄의 앤이에요. 이제부터 호주와 남태평양에 있는 우리 친구들을 위한, 그러니까 우리의 적을 위한 음악 뉴스 방송을 하겠어요. 모두 준비되셨나요? 그럼 이제 여러분 사기를 떨어뜨릴 우리의 첫 번째 펀치,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냅니다~”
오죽하면 종전 후 미국은 이 방송을 한 여성에 대해 반역죄와 전범으로 여겨 재판까지 했을까.
심리전의 무기는 말이다. 혀다. 말 한마디로 총칼을 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셈이다. 최근 발생한 버지니아 TV 방송국 여기자와 카메라 기자의 살해 사건도 그 혀, 즉 말이 문제였을 수 있다.
전직 동료 흑인 기자가 생방송 중이던 이 여기자에게 총을 발사했는데, 이유는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자신에 대한 차별을 느껴서였을 거란다. 그 동료 여기자가 ‘수박 음료를 사먹어라, 면화밭을 지나면 고향이 생각나지 않느냐’ 등의 일상적이고 동료애적인 언급을 무심코 했을텐데, 그에 대해서 인종차별로 받아들였을 것이란다. 수박을 유독 흑인이 좋아하고 또 면화밭은 흑인 노예의 상징이라서라고.
총과 화살은 살에 박히지만 말은 뇌에 박힌다. 내면을 흔든다. 적을 겨낭한 심리전을 위해서 필요한 무기지만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해를 당하게 된다.
오자병법의 말이 다가온다. “무릇 국가를 잘 다듬고 군사력을 기르려면 반드시 예를 가르치고 의를 고취시켜 백성으로 염치를 알도록 해야 한다.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전장에 나가 힘껏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긴 것을 끝까지 지키게 된다.”
적을 상대할 때도 심리 파악이 필요하지만 내부를 다스리는데도 심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충고다.
<이준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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