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툿치롤’ 사탕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작아져 가고, 또 적어져 가고 있어요.”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수석고문인 리차드 캐리 예비역 중장이 자리에 앉기 전 던진 우스개 말이었다. 이미 8순을 넘은 그는 사실 만날 때마다 더 허리가 굽어져가고 있었다. “작아져 간다”는 농담이 시큰하게 들리는 이유다. 더구나 ‘적어져 간다’도 무시 못할 말이다. 장진호 기념비 추진 중에도 연로한 미 참전용사들 사망으로 남은 이들의 수는 줄고 있었다. 실제 장진호 전투 생존자 1,800여명 중 지난 2년간 300여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몇년이면 다 사라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런데 이제 다 끝냈습니다. 한인들이 도와주셔서 가능했습니다. 우린 이제 마음의 짐을 덜고 쉴 수 있게 됐습니다.” 뉴스코리아와 달라스 평통에게 감사패를 전한 캐리 장군의 주름진 얼굴에 혹한과 중공군 포화에 산화해간 동료들에게 빚을 갚았다는 안도감이 비친다. 나만 살아나온 것에 대한 미안함을 떳떳한 기념비라도 세워 추모하려던 그들의 의지가 한인들 도움으로 완료된 걸 감사하는 마음도. 
목숨으로 대신해 준 그들의 참전 앞에 우리가 해준 건 몇십만달러 기금 마련인데, 누가 누구에게 더 감사해야 하는지. 우리가 더욱 감사한 건 이렇게라도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줬다는 점이다. 미국인 참전용사들끼리 애쓰고 있다가 한인 참전용사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한인들에게도 알려졌고, 신문사에 협조를 청한 건 더욱 잘한 선택이었다. 달라스 한인들에게도 금시초문일 정도로 역사에 묻혀있던 장진호 전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언론사에 맡겼으니 제대로 된 한 수였다. 
기사와 함께 모금운동에 앞장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기념비적인’ 연결이 이뤄진 것도 하늘의 도움이었다. 한인사회 모금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금액이 부진하던 터에, 한국 평통 ‘거물’이 달라스를 방문한 기회에 신문사 기자는 캐리 장군과의 접촉을 중간에서 거들었다. 평화 통일을 부르짖는 위치의 인물로서 장진호 전투의 실상과 기념비 모금은 그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이 될 터. 그 만남 이후로 즉각 평통과 달라스 협의회는 기념비 공사를 위한 나머지 기금 15만달러를 일순간에 마련, 전달했다. 마치 하늘에서 ‘사탕’이 쏟아져 내린 것 같았다.
사탕은 실제로 장진호 전투의 또 다른 연결고리였다. 포위된 미 해병대가 후방 보급부대에 박격포탄을 보내달라는 통신을 보내며 미국 캔디인 ‘툿치롤(Tootsie Roll)’을 보내달라 했다. 툿치롤은 미 해병대원 사이에서 박격포탄의 은어였다. 그런데 진짜 툿치롤 사탕이 한무더기로 공수돼 왔던 것이다. 그나마 혹한으로 모든 식량이 얼어붙어 있던 차에 그 사탕으로 배를 불리긴 했다는데. 이번 장진호 기념비에 툿치롤 제조사가 15만달러를 기부한 이유다.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의 저자는 한국전쟁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본다. 지금 우리 사회 남북한 모두에게 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우리 사회의 지배 질서를 구축한 이들의 속내들이 권력욕으로 가득 차 여전히 전시 상황임을 꼬집은 것이다.    
어쩌면 한국전쟁은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남북한 지도층이 국제정세를 읽는 식견이 부족했고, 분단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정세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 안일함과 더불어 기득권을 서로 빼앗기기 싫어하는 권력 욕심이 전쟁을 부추긴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무수한 권력들의 다양한 발산을 본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그 모든 게 권력욕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식,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 중요한 줄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는 우월심이다. 외형적으로 보잘 것 없는 지위에 있는데도 일상 생활을 망상으로 견디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 권력욕의 자기만족에서 나온다. 문제는 통일이나 나라 사랑을 그런 권력욕으로만 이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라 사랑은 희생이어야 한다. 그로 인해 자신이 누릴 게 별반 없어도 끝까지 하는 것, 마치 이번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위해 헌신적으로 애쓰던 이들처럼.
그건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썩어빠진 대한민국이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심정이어야 한다. 
<이준열 편집국장>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