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베리칩을 받는 것을 법으로 정하는 법안이 오마바 행정부에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진 후에 일부 미국 교회와 한인 교회 내에서는 이 베리칩이 요한계시록13 장에 기록된 짐승표인 666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신념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신자들은 물론이고 불신자들에게도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짐승의 출현은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결국 성경 본문의 문제이므로 잠시 멈추어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문제점은 없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666이란 숫자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이 숫자의 의미가 편지로서 요한계시록의 발신자인 요한과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 모두가 함께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리는 요한계시록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르는 내용을 편지로서 주고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편지의 속성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긴밀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라면 그 어떤 내용도 이 두 당사자가 이해해야 하고 있는 것이야 한다.
이러한 원리에 근거한다면 오늘날 한 때 유행하다 사라진 신용카드의 바코드 숫자의 합으로 해석하는 경우라든지 최근에 선풍적인 주목을 끌고 있는 배리 칩과 같은 것으로 666을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에 한참 벗어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발신자인 요한과 수신자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이 그러한 것들을 알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계시록 13:17에 의하면 666을 ‘짐승의 이름’ 혹은 ‘이름의 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666이 짐승의 ‘이름’이며 혹은 그 이름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라는 뜻임을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에 이름을 숫자로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불리운다. 실제로 폼페이의 어느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된 바 있다.
“나는 그 이름의 수가 545인 그녀를 사랑한다”와 “아메니우스는 그의 아내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그녀의 존경스런 이름의 수는 45이다.”
이러한 경우를 근거로 한다면 짐승의 이름이라고 하는 666이라는 숫자의 표현은 당대에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666이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누구인가 하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이 짐승에 대해서도 역시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짐승의 모델은 당시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네로 황제이다. 이는 계시록 13:3의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는 말씀이 네로와 관련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에 근거한다.
곧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 문헌 기록에 네로가 AD 68년에 황제직을 침탈 당해 사망했는데 다시 살아나서 권좌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사용하여 로마 제국 황제의 대표로 네로를 짐승의 모델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짐승의 모델이,헬라어로 된 네로 황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그 철자에 부여된 숫자를 합하였더니 666 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다 (참고. 히브리어는 철자마다 숫자 값을 가지고 있다).
결국 짐승의 이름이란 네로 황제의 이름을 의미하고 666 은 네로 황제의 이름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666의 표를 받는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네로 황제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핍박한 최초의 황제로서 로마 제국 황제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이고, 이름을 무엇인가에 쓰는 것이 소유권을 의미한다면 네로 황제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곧 로마 제국 황제의 소유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를 받아들여 그의 소유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666 이란 의미는 오늘날 베리칩과는 전혀다르다는 것이 성경 본문을 해석한 결과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666이란 숫자를 사용할 때 베리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이러한 결과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베리칩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무조건 거부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과거에 신용카드의 경우를 반면 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신용카드의 바코드 숫자가 666이라고 하여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사탄의 노예가 된다고 하여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말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지금의 베리칩과 관련된 소동은 신용카드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군중 심리에 의한 공포심은 불필요한 두려움을 가져와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자유함을 빼앗아 간다.
신용카드를 사용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그것이 자신이 재물을 사용하는 철학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리칩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놓고 일종의 생활 원칙에 의해 각자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설사 한참 양보하여, 그것이 어떤 조직에 의해 계획된 음모라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논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렇게 쿨하게 베리칩의 문제를 바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 참에 666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도 유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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