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 목사의 목회자 칼럼: 사랑의 빚진 우리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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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꼭 빠트리지 않고 가는 곳이 있다. 바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필자는 인생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선교사들의 비문을 읽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 양화진에 안장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20대 혹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낯선 조선 땅을 밟고, 우리 민족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가 그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 번영을 누리고, 필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감격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되새기곤 한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최초로 안장된 분이 존 헤론 (John W. Heron)선교사다. 그는 미국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을 정도로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이였다. 
그러던 하루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라는 이수정의 편지를 읽고는 조선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된다. 1885년 6월 21일 그는 조선에 도착한 후, 말라리아, 결핵, 각기병, 천연두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 등에 걸려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치료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광혜원에서 돌본 환자의 수가 1년에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헤론 선교사는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많은 환자들을 보살피다가 이질에 걸려 결국 1890년 7월 26일, 3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에서 사역한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윌리엄 제임스 홀 (William James Hall)은 1889년 뉴욕의 벨레뷰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사역을 하다가, 1891년 12월, 의료선교사로서 조선에 첫발을 디딛는다. 
그는 조선 곳곳을 순회하며 환자들을 치료하며 사역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청일전쟁이 1894년에 발발하게 된다. 그가 평양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에, 청군과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평양에서 펼쳐지는데, 그때 그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끝까지 돌보다가 이질에 감염되어 한양으로 이송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내 로제타 홀 선교사와 2살 된 아들 셔우드 홀, 그리고 태안에 7개월 된 딸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게 된다. 아내인 로제타 홀 선교사는 그 후 남편이 다하지 못한 사역을 43년간 이어갔고,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1926년 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와 1940년 일본군에게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그의 아내와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양화진에는 루비 켄드릭 (Ruby Kendrik) 선교사처럼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조선에 와 감동적인 사역을 하다가 사역한지 9개월 만에 묻힌 선교사도 있다. 그녀는 미국에 계신 부모님을 늘 그리워하면서도, 홀로 조선 아이들을 위해 사역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다. 그녀의 비석에는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생명이 천 개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라는 루비 선교사의 조선 사랑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R. A. 하디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 등 수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인생을 우리 민족을 위해 바쳤던 아름다운 발자취들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 그들은 칠흑과 같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던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의 영화를 버리고 목숨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신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간절히 바램이기에 기꺼이 자신을 드릴 수 있었으리라. 
필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기독교는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놀랍게 경험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도 확실하기에 목회자가 되는 길이 가장 가치있다고 여겨져 지금까지 달려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저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에게 사랑의 빚을 졌는데,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랑의 빚을 아직 예수님의 빛을 발견하지 못한 민족을 위해 쓰여지고 싶을 뿐이다.

김형민 목사
덴튼한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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